-
"프로그램 준비 완료."
-
"이제 진입하실 수 있습니다."
-
저는 채널에서 주로 영화나 드라마를 다룹니다.
-
하지만 가끔 게임 관련 소식도 확인하는 편이죠.
-
그리고 게이밍 트렌드를 살펴보기에
-
전자오락 박람회, 일명 "E3"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
매년 여름, 전 세계 게임회사들이 LA 컨벤션 센터에 모여
-
1주일 동안 신작 정보와 데모를 뽐내는 행사니까요.
-
E3의 하이라이트는 기자회견인데,
-
메이저 배급사라면 이때 가장 공들인 신작을 발표합니다.
-
수십개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가상세계가 눈앞에 펼쳐지죠.
-
그런데도 저는 E3에 갈 때마다 굉장히 실망해서 돌아옵니다.
-
아무리 많은 천재 개발자들이 최신 기기,
-
최신 기술을 동원해 신작을 내놓아도
-
E3는 사실 아주 진부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
이 모든 것이 무색하게,
-
업계는 아직도 단 하나의 낡은 도식만 고집하고 있거든요.
-
'죽거나 죽이거나.'
-
안그래도 구조나 진행이 엇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신작들이
-
하나같이 총격전, 검투, 그리고 폭발투성입니다.
-
<스타트렉>의 피카드 선장이 홀로덱을 이용할 때도
-
이런 심정이었겠죠.
-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환불하시게요?"
-
"환불은 얼어죽을, 널 죽이러 왔다!"
-
"컴퓨터, 프로그램 일시 정지!"
-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
"너무 폭력적이라구."
-
"난 쉬러 온 거지, 총질하러 온 게 아니야."
-
"새로고침해."
-
게임은 이제 1조 달러 규모의 산업입니다.
-
실로 엄청난 크기죠.
-
E3는 말하자면 이 산업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게임업계의 거시적인 방향을 분석하기 좋은 행사죠.
-
그래서 올해는 E3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주요 신작들을 모아
-
간단한 통계를 내봤습니다.
-
"쓸만한 게 있나 보자구."
-
총 133편의 게임 중에서
-
전투가 없는 작품은 단 20편인데,
-
그나마도 10편은 스포츠, 레이싱 게임입니다.
-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
82%는 전투가 중심이고,
-
3%는 전투가 아주 적거나 이벤트성인 경우,
-
5%는 스포츠,
-
3%는 레이싱,
-
1%는 리듬게임인데,
-
이러면 남은 7%만 기타 비전투 게임입니다.
-
E3씩이나 되는 행사에서조차 타이틀의 82%가 전투 중심이라면,
-
개발자들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
항상 이런 식이었나 싶어서,
-
근 3년치 E3 통계를 비교해보니
-
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
원래는 항목을 따로 만들어서
-
내러티브 중심, 어드벤처, 퍼즐, 건설 시뮬레이션, 탐사 등
-
다양한 장르의 게임도 정리하려 했습니다.
-
그런데 타이틀 수가 너무 적어서
-
항목을 따로 만드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
집계 방식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
저는 게임의 폭력성보다는 전투 유무에 집중했습니다.
-
비전투 항목에 있는 게임이라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거죠.
-
실제로 비전투 항목의 10편 중 3편은
-
꽤 잔인한 서바이벌 호러물입니다.
-
여기서 '전투'와 '폭력'의 구분이 중요합니다.
-
전투는 게이머가 직접 폭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폭력은 어쩔 수 없이 인류 공통의 기억이자 경험입니다.
-
게임에 폭력이 나오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죠.
-
하지만 게임이 전투에 치중할 경우,
-
폭력은 비극성이 지워진 채
-
화려한 오락거리가 되어버립니다.
-
"연달아 25킬을 달성한 플레이어에게는"
-
"전술 핵탄두 특전이 주어집니다."
-
"이번 판도 후끈 달아오르겠군!"
-
"시작!"
-
물론 전투라고 다 같은 건 아닙니다.
-
전투 항목의 게임들을 다시 세분화해보도록 하죠.
-
2017년 E3통계의 전투 항목 108편 중
-
20편은 폭력성이 '만화적'이었습니다.
-
이 게임들은 '죽거나 죽이거나' 보다는
-
'맞거나 때리거나' 정도의 수위입니다.
-
폭력을 귀엽다 못해 사랑스럽게 연출하지만
-
그럼에도 전투가 중심이라 공격적인 플레이가 불가피하고
-
따라서 게이머는 게임 속 세상을 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
피는 조금 덜 튈지 몰라도,
-
기본적으로 당하기 전에 가해야 하는 도식은 그대로입니다.
-
이건 게임업계가 자초한 일이기도 합니다.
-
제작사들이 수십년간 게임의 전투 시스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
게이머, 개발자, 그리고 심지어 배급사마저
-
전투가 곧 게임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회장이 올해 E3에서 말했듯이 말입니다.
-
"게임은 곧 재미입니다."
-
(레지 피서메이, 닌텐도)
-
"게임은 곧 전투입니다."
-
"재미가 없으면 게임이 아닙니다."
-
"그리고 전투가 없으면 재미가 없죠."
-
이렇면 게임은 물론이고
-
'재미'의 정의도 상당히 좁아집니다.
-
게임 업계가 폭력적 전투 시스템에만 집착한다면
-
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
게임플레이 시스템은 게임의 규칙이자 가이드라인입니다.
-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상, 인물,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
상호작용하기 위한 도구 세트라고 볼 수 있죠.
-
"맞고 싶어 환장했군!"
-
우리가 여태 살펴본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
오직 전투만으로 모든 문제와 갈등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
가진게 망치뿐이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는 속담이 적절하죠.
-
차이가 있다면 게임의 경우,
-
플레이어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이
-
이미 플레이어가 내려칠 수 있는 못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
게임 속에서 주된 도구가 기관총이라면,
-
플레이어로서는 쏘는 것 외에 행동의 선택지가 거의 없습니다.
-
"한 놈이 자꾸 '으어어!' 하길래"
-
"그놈부터 빵!"
-
"옆에 있던 다른 놈도 빵!"
-
"내친 김에 지나가던 두어명도"
-
"빵야! 빵야! 빵야!"
-
"생각해 보니까 많이도 쏴제꼈네."
-
게임이 전투 시스템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
인물들과 감정을 주고받거나
-
갈등을 창의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많이 줄어듭니다.
-
"다시 일하러 가야겠구만!"
-
물론 갈등 자체는 게임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
하지만 갈등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
개인적인 것부터 전 우주적인 것까지 광범위하죠.
-
갈등이 다양한 만큼 해소 방법도 여러가지입니다.
-
죽여 없애는 방법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
소수지만 비폭력적 선택지가 있는 게임도 더러 있습니다.
-
인디게임 <언더테일>의 경우
-
원한다면 모든 갈등을 대화로 풀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입니다.
-
RPG 게임의 경우에도
-
전투 외에 일거리가 많긴 합니다.
-
하지만 대부분 전투를 받쳐주는 역할에 그칩니다.
-
NPC와 대화해 퀘스트를 얻어내더라도
-
퀘스트를 깨려면 꼭 무언가를 죽여야 하는 식이죠.
-
아이템을 사고 팔거나 새로 만들 수도 있지만
-
전부 살생을 돕는 아이템입니다.
-
"폐허에서 며칠 구르다 보면 집에 가서 쉴 때도 있어야지."
-
"나만의 집!"
-
집을 지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집을 지키려면 더 많이 죽여야겠죠.
-
"밖에는 약탈자들이 많기 때문에"
-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아무리 선택지가 많아도
-
모두 전투 시스템의 부속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이 주제가 제게 특별한 이유는
-
제 채널의 주된 소재가
-
매체에 비치는 남성과 남성성이기 때문입니다.
-
대중문화에서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
대립하고 공격하는 폭력적 남성상입니다.
-
이건 게임에 특히나 더 해당되는 얘기인데요.
-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거나
-
감정적으로 섬세하게 접근하는 남자 주인공이
-
얼마나 드문지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
"동정심을 버려야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단다."
-
외교적 전략이나 평화적 접근,
-
협상이나 타협 등은
-
힘으로 때려 부수는 재미에 밀려 뒷전입니다.
-
이러면 게임이 연출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다양성이
-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
제가 SNS상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면,
-
누군가가 항상 "그럼 적들이랑 싸우지,"
-
"포옹하고 차 마시고 춤추겠냐"는 식으로
-
비웃으며 딴지를 걸어옵니다.
-
그러고는 제가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하겠지만,
-
다들 자기도 모르게 훌륭한 대안책을 내놓은 겁니다.
-
저는 그런 게임 해보고 싶거든요.
-
그리고 장담하건데 저같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겁니다.
-
인터랙티브 미디어의 잠재성은 그야말로 무한합니다.
-
우리가 느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을
-
아주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죠.
-
게임을 하며 사랑, 친밀감, 동질감 등을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오픈월드 게임에서 응급구조대원, 소방관,
-
의무병이나 환경운동가,
-
심지어 우주 수의사로 플레이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
아니면 거대 우주선에서 식량을 재배하는 농부도 괜찮겠네요.
-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
E3에서 본 신작들 태반이 세기말 배경이지만,
-
남은 자원을 놓고 싸우기보다
-
붕괴된 사회를 함께 재건하는 플레이가 가능하다면 어떨까요.
-
사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게임 내러티브는 너무나도 많은데
-
개발자들이 우리에게 쥐어주는 총칼에 가려
-
여태 보이지 않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
7%짜리 비전투 게임 통계로 돌아가 봅시다.
-
앞서 말했듯이, E3도 매년 전투라는 틀을 깨고
-
게임의 무한한 잠재성을 짐작케 하는 타이틀을 소수 선보입니다.
-
좋은 예로 <타코마>가 있습니다.
-
실종된 우주 정거장 승무원을 찾기 위해
-
증강 현실 기술로 사건을 추리하고 재구성해 나가는 게임입니다.
-
오히려 이런 저예산 인디 게임들이
-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
우리에겐 이런 게임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
'패트리온'에서 저희 프로젝트를 후원하시면
-
이렇게 성정치와 엔터테인먼트의 교차성을 탐구하는 콘텐츠를
-
더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
후원해주시면 채널 운영에 큰 힘이 됩니다.
-
다음 달에는 너드 커뮤니티의 성차별과
-
드라마 <빅뱅이론>에 관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