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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영상에서 우리는 19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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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수감되는 것까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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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1923년 유명한 쿠데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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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멕주 홀 폭동의
실패로 수감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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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그는 '나의 투쟁'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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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출소할 때
그러니까 그가 감옥에 투옥 중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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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은 금지되었고
많은 경제적 공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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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전복의 가능성이
더 높아져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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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20세기 초반에 보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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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독일은 극심한 물가상승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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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이제 히틀러가
출소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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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하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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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여
상황을 좀 더 안정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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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와 히틀러는 상처로부터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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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지위에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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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관점에서 히틀러는
계속 그의 영향력을 늘려 왔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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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뛰어난 연설가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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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아 보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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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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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그의 책은 출판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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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로 몇 년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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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권이 판매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독일 정치 대부분의 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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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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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빠르게 20세기
후반부로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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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영향력을 계속 늘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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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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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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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변화를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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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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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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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공황의 첫 번째 징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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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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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 주식 시장의
붕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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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화요일로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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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 시작의 상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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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만의 대공황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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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대공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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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 세계는 대공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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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혼란이 생길 때 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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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파에 좀 더 활력이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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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같은 당이든 아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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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건 극우파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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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파로 자주 여겨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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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국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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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들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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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극좌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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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하게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세력들까지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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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30년 선거로
우리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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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의회 선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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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인 라이히슈타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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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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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발음을 잘못하고 있는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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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그 선거에서
나치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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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많은 득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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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8%에 달하는
득표율을 얻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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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의회 대표를 할 수 있는
비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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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갑자기 나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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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조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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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중요한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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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1932년을 보면
경제는 개선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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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악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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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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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실제로
대통령을 향한 행보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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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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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본 힌덴부르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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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덴부르크 전선으로 유명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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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동명의 비행선
폭발 사고로도 유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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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루덴도르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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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두 명의
장성 중 한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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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25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임관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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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재선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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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히틀러는
상당한 득표수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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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35%의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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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35%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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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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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런 이상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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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는 사뭇 다른 대선 제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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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재의 독일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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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의회 제도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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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독립적으로
선거가 치뤄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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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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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또한 별도로 선거를 치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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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지배하는 연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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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하려고 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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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1932년
히틀러는 이제 주요인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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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또한 의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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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의석을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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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1932년에 행해진
여러번의 의회 선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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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의 의회 선거까지
살펴볼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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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 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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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에 정부 기관을 형성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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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과 근본적으로
내각의 수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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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을 선출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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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당들이 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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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의 득표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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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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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를 얻을 수 있도록
각 당들은 내각을 구성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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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당들 간에 협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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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빈틈없는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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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내각을 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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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당에서 내각 장관을 하게 해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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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당이 의장을 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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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정부를 지배할
내각을 구성하는 것은 어떻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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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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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번의 의회 선거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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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 내각 구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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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두 번의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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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것이 의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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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것이 대선에
포한된 것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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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덴부르크는 여전히
대통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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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히틀러는 상당한
득표수를 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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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의회 선거를
치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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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선거,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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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크 선거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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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을 구성하지 못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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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가 안되어, 내각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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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는 여기서 계속해서
주요 정당으로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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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라이히슈타크 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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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많은 득표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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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33년쯤
약간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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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33년 초 무렵으로 가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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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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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없고, 의장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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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집행부인 내각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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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정부 기능이 마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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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 내각이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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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헌법은
이 이상한 상황을 허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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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통령이 정부를
임명하게 허락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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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의장까지도 임명하게
허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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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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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의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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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파울 본 힌덴부르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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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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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전자로 보여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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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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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각 정부의 우두머리가 될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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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은 국가적 화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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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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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후에 있을 의회 선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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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 득표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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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제가 추측하기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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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합법적인 정부를
만들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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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파울 본 힌덴부르크는
그렇게 확신하였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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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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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치가 아직 소수당에 불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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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요 내각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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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의 추종자가 아닌
파울 본 힌덴부르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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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의장으로 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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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1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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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월에 히틀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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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으로 임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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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 근본적으로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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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크의 수상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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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2월에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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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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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베를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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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크 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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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것이 라이히슈타크
의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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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화재가 일어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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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여기 이 화면에서
이 신사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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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누스 반 데어 누베라는
네덜란드 출신 공산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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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공산주의 혁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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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시작으로 벌어진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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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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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선동 문구로 이용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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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파울 본 힌덴부르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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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으로써의 긴급 조치 명령을
사용할 것을 충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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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헌법이 승인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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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상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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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긴급 상황에서 대통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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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권리를 제한시킬 수 있도록
승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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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은 긴급 상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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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파울 본 힌덴부르크는
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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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본적으로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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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크 화재가 일어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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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덴부르크는 확신하여
나치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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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슈타크 화재 법령을
통과하도록 공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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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법령은 본질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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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긴급 상황에 대한
권한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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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관점에서 실제로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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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인 자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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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헌법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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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승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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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자유를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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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이 없는 이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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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내각이 모든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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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적인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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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의회 선거가 3월에 있을
예정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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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 내각 형성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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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월 선거에서는
특히, 시민 자유 제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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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이미지는
실추된 상태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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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들은 의회 군사조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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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당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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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득표를 좀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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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후보자들도 위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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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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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선거는 나치에게
크게 우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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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3월 선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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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44%의 득표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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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스스로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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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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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전히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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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은 이제 라이히슈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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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회에서 가장 큰 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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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제 과반수 내각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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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측하기로는
좀 더 합법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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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것은 협박에 의한
선거의 결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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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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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수 내각을 기반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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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구성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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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의장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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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후, 이 새로운 의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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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법을 통과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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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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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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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헌법의 개정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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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각과 특히 의장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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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으로 내각의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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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4년 간 무제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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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지위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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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법적 지위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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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겠지만, 이미 시민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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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한 적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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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라이히슈타크는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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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지위를 넘어서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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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에게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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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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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에 대해 대통령이 확인한
몇 가지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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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힌덴부르크는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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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로, 시민 권리 제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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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법 이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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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근본적으로
완전한 통제권을 얻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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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는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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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독일 정부의 통제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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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히틀러는 독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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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일의 독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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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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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른 당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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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투옥시키기 시작했고
1933년 7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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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매우 빠르게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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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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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합법적인 정당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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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완전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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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것이 히틀러가 어떻게
권력을 얻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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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러분의 머리 속에
맴돌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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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불을 질렀을까?"라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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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재가 기폭제가 되었고
히틀러가 의장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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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는 그것과는 관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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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권력을 얻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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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화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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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마리누스 반 데어 루베가 한 것처럼
보이는 증거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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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에 대한 비난거리가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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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부에 훨씬 큰 권력을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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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로 사용된 선동 문구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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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치는 훨씬 더 큰 권력을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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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결론이 난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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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의문이 많이 남는
문제 중 하나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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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문제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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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냥
공산주의자의 음모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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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누스 반 데어 루베의 단독 범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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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히틀러의 손에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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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당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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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다른 역사학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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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실제로 나치가 긴급 사태를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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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누스 반 데어 루베는
이 모든 계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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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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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역사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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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필요도 없이, 1919년부터
1933년까지 히틀러는 무명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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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독일의 독재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