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질하는 소리)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 : 저는 파리의 거리로 갔습니다. 철거된 건물에서 재료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저는 10대 시절부터 프랑스의 시인인 앙토앵 아르토(Antonin Artaud)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재료가 부딪치는 소리) 파리에서의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저는 그에게 다시 연락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가 지속적으로 언어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이것은 앙토앵의 파리 지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가능한 경로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개의 선을 만들었습니다. 점들 사이에 있는 선들은 앙토앵의 정신을 대변합니다. 이 전시회를 위해서 저는 파리의 거리로 갔습니다. 그 뒤에 저는 앙토앵의 파리 지도를 사용했습니다. 앙토앵이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술을 마시기 위해서 가곤 했떤 장소들에 설치할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저는 그 장소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그 장소에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조각을 남겨두었습니다. 제가 만든 작품의 이미지가 남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오직 제가 만든 장소의 이미지가 존재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 일은 저한테 큰 실험이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저 자신의 방법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니까요. (망치질 하는 소리) 이 프로젝트에서 저는 리퍼런스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훈적인 방식으로 앙토앵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나무로 만든 이 큰 작품에 목걸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물론 이것은 목걸이가 아닙니다. 처음에 작품을 시작할 때 저는 이 작품이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하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연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발견을 할 때까지는요. 저는 다른 비디오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곳 파리에서 2007년에 작품을 만들었고 그 때 우리가 파리를 떠났습니다. 우리는 3년 반동안 이곳에 살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달리는 모습입니다. 이곳에 살고는 있지만 이곳 출신은 아니고 이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저 자신의 달리는 모습이에요. 관념으로서 자가건축(autoconstrucción)의 개념은 자신의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법이나 기술 또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회적 상황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아파트나 주택을 일시불로 구매할 돈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친척 중 한 분의 초대를 받은 후 60년대 중반에 이 곳으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사촌 중 한 분이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곳에 땅이 있고 그 땅의 환경이 좋지 않아 누구도 사용하지 않아요." 아버지의 사촌은 그 땅이 판매 중이 아님에도 아버지에게 땅을 팔았습니다. 그 곳에는 바위만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지역사회와 함께 그들은 서로를 도왔고 그들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건축이나 건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재료들을 가지고 임시변통으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곳은 큰 안뜰이었습니다. 저곳에는 부엌이 있었습니다. 저쪽에는 침실이 있었고 집의 입구가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담장이 있었어요. 거리라고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바위가 흩어져 있을 뿐이었죠. 워커 아트 센터(the Walker)에서 열린 전시회는 회고적이라고 간주되지 않습니다. 자가건축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작품의 모음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이죠. 저의 작품에 언제나 있었던 것은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자가 건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거나 다루는 것은 스페인어로도 표현하기에는 어려운데요. 이곳에는 제가 자가건축과 관련하여 만든 작품들 있습니다. 이곳은 자료실인데요 여기에 멕시코 역사나 다른 도시로의 이주에 관한 참조문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할 때 이것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가족 아카이브에서 가지고 온 저의 이웃을 찍은 사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만든 실크 스크린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책자 원본의 사본들입니다. 그리고 필터랑 포스터가 있어요. 1968년부터 오늘날까지 일어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운동에 관한 거에요. 이것은 더 교훈적인 장치입니다. 사람들은 저의 자가건축이라는 개념의 맥락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가건축과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저에게 중요했습니다. 저의 교육과 자가건축이라는 개념에 대한 저의 설명에서 그러했죠. (개가 짖음) (개가 짖음) (두 사람이 외국어로 대화를 나눔) 저의 어머니는 토착민의 딸입니다. 그들은 멕시코 시티 타쿠바야 근처의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문제와 마주쳤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은 훨씬 나빴어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역사를 구성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사람들 및 이웃들과 함께, 우애와 결속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을 변하시켜야 했습니다. 그 뒤에 어머니는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더 강한 여성이 되었고 저희 가족 뿐 아니라 저의 이웃들에게까지도 훌륭한 모범이 되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셨고 서비스를 요구했습니다. 물이나 하수 시설 또는 전기 같은 거요.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이런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집이 중요합니다. 이 집은 특정한 필요에 따라서 시간을 들여 형태를 만들어낸 곳일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서 만들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몇 개의 비디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을 따로 인터뷰했고, 그래서 그들이 집을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에 대해서 상반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가 어린 아이였을 때 , 저는 두 분의 다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외국어 언어로 말이 오버랩됨) 저의 아버지는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실제에 대한 관념이 다양한 방식에서 실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풍경을 보시고 식물과 바위들을 좋은 것으로 설명하실 때에요. 그리고 저의 정체성은 그분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시각과 대단히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투쟁, 다툼, 정부의 부패와 가난에 더 많이 개입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외국어로 이야기가 오버랩됨) 저는 실제에 대한 이런 대조적인 두 가지 시각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그리곡 그런 점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대립적인 가치관을 저의 정체성으로 인식합니다. 저는 점점 더 저의 작품의 요소로 이것들을 받아들였고, 대조와 불안정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며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엘 탈레르(El Taller)라고 부르는 이 공간에서 저희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으시고 음악을 들으셨습니다. 그분이 그림이나 조각을 더이상 하지 않으셨을 때에도 우리는 그곳을 엘 탈레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방식에서 이 공간은 집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회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고아가 아니라 미혼모의 아들로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저희 할머니가 그곳으로 아버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의 습관 채택했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구하는 법과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은, 프린치스코 회의 사람들과 함께 배웠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도로 자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종교와, 하나님과, 모든 것에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저의 작품이 이런 종류의 애니미즘을 차용하였습니다. 저는 도교 같은 다른 방식의 철학들과 애니미짐을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분에게는 수도회를 떠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와 그가 살았떤 삶을 사랑하십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만드신 물건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상업 화가에 가까우셨습니다. 그는 수백 개의 그림들을 그리셨고, 그 그림들은 같지 않지만 아주 비슷했습니다. 아버지는 트렌드나 스타일이나 그런 것들을 따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셨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 물건들을 만드셨습니다. 벽을 보면 60년대에 저의 어머니의 초상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버섯같은 비슷한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90년대 초반에 제가 만든 작품들은 저희 아버지의 그림들과 비슷합니다. 이 작품들 가운데 하나를 쇼에 포함시켰어요. 그 작품의 이름은 "유용하지만 아름다운 대상(Objeto Util Pero Bonito)"입니다. 이 작품에서 저희 아버지가 그린 그림의 핸드레일 가운데 하나를 사용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저의 정체성과 맥락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저에게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모든 대상들을 제 작품이 집어넣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 작품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함께 할 수 있으며, 함께 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비유로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 이 계단을 통해서 여러분은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이곳에 휠체어를 놓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