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우리는 기후변화나
백신의 안전성 같은 이슈를 접합니다.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의 대답은
과학 정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가 온난화되고 있고
백신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옳다는 걸
어떻게 알죠?
왜 우리가 과학을 믿어야 하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을 믿지 않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상당수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인류에게 있다는걸 믿지 않습니다.
자연도태에 따른
진화도 믿지 않구요.
백신이 안전하다는 말도 의심합니다.
그럼 왜 우리는 과학을 믿어야 할까요?
과학자들은 과학을 두고
믿음을 말하는걸 싫어합니다.
사실 과학과 신앙은 대조적이며,
믿음은 신앙의 영역에 있는 것이죠.
신앙은 과학과 구별되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종교는 신앙에 기반한 것이거나
또는 파스칼의 내기에 나오는
계산법일 수 있습니다.
블레즈 파스칼은
17세기의 수학자였습니다.
파스칼은 신을 믿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과학적인 이유를 대려고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신을 믿는다면
그다지 잃을 것이 없다.
뭐 일요일에 몇 시간 정도?
(웃음)
하지만 신이 존재하는데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난 큰 곤경에 처한다.
그래서 파스칼은
신을 믿는게 좋다고 했죠.
어쩌면 그는 제 동료 교수처럼
"신앙의 난간을 붙잡고 있는"
것이겠죠.
그는 맹목적 신앙을 선택했고
과학과 합리주의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이죠,
우리들 대부분에게
대다수 과학적 주장은
맹목적 신앙과 같습니다.
대부분 경우에 우리는 스스로
과학적 주장을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사실 대부분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분야가 아니라면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지질학자가 백신이 안전한지를
말해줄 수는 없잖아요.
또 화학자들 대부분은
진화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물리학자 또한
담배가 암을 유발하는지 아닌지
확답을 줄 수 없죠.
그러니까 만약 과학자들조차도
자기 전공 외 분야에 대해서
맹목적 믿음을 가져야 한다면,
왜 그들은 다른 과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일까요?
왜 과학자들은
서로의 주장을 믿는 걸까요?
그리고 우리도 그걸 믿어야 할까요?
제가 주장하는 바는,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시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학교에서는
과학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과학적 방법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과학자들은 어떤 방법을 따르는데
그 방법이 가설의 사실 여부를
증명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방법론을
교과서적 방법론이라고 부릅니다.
가설 연역적 방법이죠.
표준 모델, 교과서 모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가설의 결과를 추론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발표하면서 묻습니다.
"자, 이 결론이 맞나요?"
이것이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걸
관찰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과학자가 말합니다.
"좋아, 이 가설이 옳다는걸 알았어."
과학사에 나오는 여러 유명한 사례에서
과학자들은 이렇게 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죠.
그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었을 때
그 이론의 한가지 결론은
시공간은 그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태양처럼 거대한 물질이 존재하면
휘어진다는 것이었죠.
만약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빛이 태양을 지날 때
실제로 그 주변에서 휘어야 합니다.
이것은 깜짝 놀랄만한 예측이었고
수년이 지난 후에야 과학자들이
실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에 한 실험에서
이 가설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별빛은 태양 주변을 지날 때
정말로 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확증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과격하고 새로운 이론이
사실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수많은 신문이
이를 보도했습니다.
이제, 이런 이론 혹은 이런 모델은
연역-법칙적 모델이라고 불립니다.
학자들이 말을 어렵게 하는 걸
좋아해서 그래요.
이상적인 경우에
법칙에 관한 것이죠.
법칙적이라는 건
법칙과 관련이 있다는 거죠.
이상적인 경우,
가설은 그저 생각이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이죠.
자연의 법칙인 것은 왜 중요할까요?
법칙이라는 것은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칙이라면
언제나 사실이어야 합니다.
어느 시공간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사실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알만한 유명한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E=MC²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죠.
이 관계는 어찌되었든 사실입니다만
지금은 이 이론에 관한
몇 가지 오류가 밝혀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틀렸다는 거죠.
맞지 않아요.
(웃음)
이게 왜 틀렸는지
세가지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첫 번째로는,
논리적인 이유에서 틀린 겁니다.
결과를 단언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죠.
즉 또 하나의 공상이며,
학문적으로 말하면
잘못된 가설이 올바른 예측을
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측이 맞다고 해서
이론도 옳다고
논리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시가 하나 있는데요,
역시 과학사에 있던 일입니다.
이 그림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앙에 있고
태양과 다른 행성이
주변을 돌고 있죠.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은 수 세기동안
대부분 지식인이 사실로 믿었습니다.
왜일까요?
이에 근거한 많은 예측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으로
천문학자들은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 정확했습니다.
이런 사례가 바로
교과서적 모델의 문제점입니다.
두 번째로, 실제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보조 가설의 오류이기도 하죠.
보조 가설은
과학자들이 추측을 하는 겁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말이죠.
이에 대한 중요한 사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입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대체했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며
지구는 태양 주위를 움직인다고 했는데,
과학자들은 말했죠.
"니콜라우스, 그게 사실이라면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네."
이 그림은 별의 시차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은 이렇습니다.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눈에 띄는 별,
예를 들어 시리우스를 볼 때,
- 물론 맨하탄에 사는 우리는
별을 볼 수가 없지만,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
12월에 시리우스를 봤을 때
배경에는 더 먼 별들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6개월 뒤에 다시 별을 보면,
6월엔 지구가 이 위치로
이동했으니까
똑같이 시리우스 별을 봐도
뒷 배경은 달라야 합니다.
이런 차이, 각도의 차이가
바로 별의 시차입니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기반한 예측이었죠.
그래서 천문학자들이
별의 시차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시차가 없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뒤늦게 우리는 천문학자들에게
두가지 보조 가설이 있었고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첫 번째는 지구 궤도의 크기를
잘못 추정한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은 별들의 거리에 비해서
지구의 궤도를 크게 추정했죠.
오늘날 별의 시차 모형은 이렇습니다.
이건 NASA에서 만든겁니다.
보다시피 지구의 궤도는 아주 작죠.
실제로는,
이 그림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그러므로 별의 시차라는 건
매우 작고
감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측이 틀리는
두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천체망원경의 성능이
별의 시차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고 가정했던 것입니다.
망원경은 그만큼 정교하질 못했죠.
19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과학자들이 별의 시차를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세 번째 문제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단순히 사실적 오류입니다.
대부분의 과학이
교과서적 모델에는 맞지 않습니다.
대부분 과학은 연역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귀납적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꼭 이론이나 가설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세계의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하곤 합니다.
이에 관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
찰스 다윈입니다.
다윈이 젊어서
비글호를 타고 여행할 때
그는 가설도, 이론도 없었습니다.
단지 과학자 경력을 쌓고 싶어했고
정보 수집을 시작했죠.
피를 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의학을 싫어하는 것을 알았고
다른 진로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윈은 많은 것들을 수집했는데,
유명한 참새류도 그 일부였습니다.
그는 새들을 모아서
가방 안에 던져두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죠.
몇 년 후 런던에서
다윈은 수집한 정보들을 다시 보다가
어떤 해석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 도태 이론입니다.
귀납적인 과학 이외에도
과학자들은 종종
모델을 만드는데 참여합니다.
과학자들이 생전에 하고 싶은 일 하나가
사물의 원인을 설명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한가지 방법은 이론을 시험하는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진 속 인물은 헨리 카델입니다.
19세기의 스코틀랜드 지질학자죠.
사냥모자와 웰링턴부츠를 신고 있으니
스코틀랜드 사람인 건 아시겠죠?
(웃음)
카델은 이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산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리고 카델이 관찰한 바로는
아팔래치아 산맥을 예로 들면
접혀진 바위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바위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접혀져 있습니다.
카델이 생각하기엔
이 바위들이 옆에서 눌린 것이었죠.
이 생각은 후에 대륙이동설에 관한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카델은 이 모형,
이 괴상한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레버와 나무, 그리고 손수레,
양동이, 커다란 해머가 있습니다.
왜 웰링턴부츠를 신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비가 오려고 했나 보죠.
카델은 이 실제 모형을 만들어서,
여기서는 진흙을 사용했는데
바위에 문양을 만들거나
산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쪽에서 압축해서 말이죠.
그것은 산의 형성 원인에 관한
논증이었죠.
요즘에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앉아서 연구합니다.
실제 모형을 많이 만들지 않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합니다.
물론 시뮬레이션도 일종의 모형이죠.
수학으로 만들어진 모형입니다.
19세기의 실제 모형과 마찬가지로
원인을 생각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큰 문제는
지구가 점점 더워지고 있다는
증거가 엄청나게 많다는 건데요.
여기를 보시면, 검은색 선은
과학자들이 지난 150년간
측정한 것입니다.
지구의 온도가 꾸준히
높아지는 것이 보이시죠.
특히 최근 50년 동안에
거의 섭씨 1도 정도,
혹은 화씨 2도에 가깝게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킬까요?
더워지는 현상을 관찰했는데
원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과학자는 모형을 만들 수 있어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해서요.
이 표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에는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요인들이 나타납니다.
대기오염으로 생긴 황산화입자,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
태양 복사열의 변화,
그리고 물론 온실가스도 있죠.
과학자들은 어떤 변수 요인이
우리가 보는 현실을
재생해내는지 물었습니다.
여기 검은 선이 실제 현실입니다.
여기 엷은 회색선이 모형인데,
그 대답은
이 모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죠.
관측된 기후 변화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실가스를 포함한 이 모든 요인을
함께 집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온실가스의 증가가
지난 50년간
기온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과
비슷함을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기상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일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주요 원인이 온실가스라는 것도
알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자, 이 모든 다양한 일들을
과학자들이 하기 때문에,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발전을 막지 않는 유일한 과학 원칙은
어떤 것이든 좋다는 것이다."
이 말은 때로는 문맥을 벗어나서
인용되곤 합니다.
사실 파이어아벤트가 하려던 말은
과학에선 뭐든지 허용된다는 게
아니었어요.
그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과학적 방법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대답을 강요한다면
어떤것이든 허용된다고 답하겠다."
그가 말하려던 의미는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는 것이었죠.
과학자들은 창의적입니다.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오게 되는군요.
과학자들이 단일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판단은 누가 하나요?
답을 말하자면,
그 판단은 과학자들이 합니다.
판별 증거들을 가지고 판단하죠.
다양한 방식으로 증거를 모으지만
어떤 식으로 수집했던간에
철저하게 조사해야합니다.
그래서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자료와 증거를
철저히 검증하는지 탐구했고
과학자들이 조사하는 방식을
"조직화된 회의주의"라고 했습니다.
조직적이라고 한 이유는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그룹을 이루기 때문이고,
회의주의라고 한 이유는
의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증명할 의무는
가설을 제기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입니다.
과학자 집단이 설득을 당해
"그래, 알겠어, 이건 옳아"라고
말하는 일은 드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개념이
인기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바로는,
과학적 사고가 크게 변화한 일은
과학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증거를 판단한다면
어떻게 의견이 일치되는지에
역사학자들은 주목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이란,
과학적 지식이란
과학 전문가들의 합의란 것이죠.
조직화된 검증, 집단적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증거를 판단하고
결론에 이른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전문가들의 합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과학을
배심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매우 특별한 배심원이죠.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괴짜들로 이뤄진 배심원이죠.
모든 배심원이 박사 학위가 있어요.
일반적인 배심원과 달리
유죄 또는 무죄 2가지 선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은
여러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옳으면 옳다고 할 수 있어요.
틀렸으면 틀렸다고 할 수 있어요.
또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더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자"고
할 수도 있죠.
아니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제대로 증명할 방법을 모르니까
우선은 제쳐두고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고
할 수도 있죠.
이런 경우를 과학자들은
"다루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면 우리는
마지막 의문에 도달합니다.
과학자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그저 권위에 호소하는 것 아닌가요?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나요?
이 점이 바로 현대 과학의 역설입니다.
제 생각에,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사회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은
과학이 사실은
권위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건 개인의 권위가 아닙니다.
개인이 얼마나 똑똑한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또는
아인슈타인이라 해도 말이죠.
과학은 집합적 공동체의
권위에 호소하는 겁니다.
군중의 지혜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엔 특별한 종류의 집단이죠.
과학은 권위에 호소를 합니다만,
그건 개인에게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그 개인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근거는 집단적 지혜,
집단적 지식, 집단적 연구입니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는 과학자 모두의 것이죠.
과학자들에겐 집단적으로
의심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증명해 봐" 하는 문화죠.
여기 멋진 여성이 동료들에게
증거를 보여주는 모습이 있네요.
물론, 이 사람들이
진짜 과학자 같지는 않네요.
너무 행복해 보이니까요.
(웃음)
자, 그래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다들 아침에 일어나고,
자동차를 신뢰합니다.
저는 맨하탄에 살기 때문에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맨하탄에 살지 않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차를 탑니다.
시동을 걸면 차가 작동을 하죠.
놀랍게도 잘 작동합니다.
요즘 자동차는 거의 망가지지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어째서 이렇게 잘 작동하는거죠?
그건 핸리 포드, 칼 벤츠, 또는
엘론 머스크같은 사람들의
천재성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현대의 자동차가
100년이 넘는 노동의 산물이며,
거기엔 수백, 수천, 수만명이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자동차는 그 동안
자동차 산업에 종사해온
각각의 남녀의 집합적 노동과
지혜와 경험의 산물입니다.
기술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축적된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차를 타는 것은
천재였던 벤츠나
포드나 머스크 덕분이 아니라
현대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해온 모든 사람들의 노력과
집단적 지식 덕분이죠.
과학도 자동차와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과학이 더 오래 됐죠.
우리가 과학을 신뢰하는 근거는
기술을 신뢰하는 근거와 같고,
무엇이든 신뢰하는 것,
말하자면, 경험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신뢰는
우리가 아무 것이나 믿는
맹목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과학에 대한 신뢰는, 과학처럼
증거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소통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지요.
뭘 아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알았는지도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더 나은 청취자가 되려 노력해야겠죠.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