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 건물벽이 말할 수 있다면 각자 할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지혜라고도 불리는 아야 소피아 성당만큼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가진 건물은 많지 않을 겁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은, 대륙과 문화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자체의 구조와 목적을 위해 성당이 위치한 도시의 이름이 많이 바뀌었죠. 그리고 오늘날 성당은, 각 시대를 대변하는 요소를 바탕으로, 성당을 방문하는 어떤 방문객에게도 이야기를 들려 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야 소피아 성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원전 167년 비잔티움이라고 그리스인들이 그 이름을 지은, 도시를 둘러싼 고대 성벽을 보면 우리는 이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어림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수 세기동안, 이 도시의 이름은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의 지배하에, 재정복과 정복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아우구스트 안토니아, 뉴 로마,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변화해 왔습니다. 그리고 4세기에, 이 성벽 안에 대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메겔라 에켈레시아가 건축되었습니다. 비록 메갈레 에켈레시아는 곧 민란에 의해 불타 없어졌지만, 소실 이후까지도 수 세기동안, 이 성당은 이 도시의 지위를 종교적 주요 성지로서의 입지로서 격상·유지시켜주었습니다. 입구 주변에 위치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대리석은 두번째 교회를 연상시켜주는 마지막 유적입니다. 기원전 415년에 세워진 두번째 성당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거의 폐위될 뻔 하였던 전차경기 때 일어난 552년 중인 니카 반란 중, 성난 관중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는 상황 속, 그는 성당은 더 큰 규모로 재건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5년 후, 화면 속에서 여러분이 보는 건축물이 완공되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성당의 벽과 바닥의 돌들이 우리들에게 돌들의 고향인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야기들을 소근거립니다. 또한,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기둥들은 더 옛날을 회상시켜줍니다. 황제의 수석 바이킹 경호원들의 룬 문자로 쓰인 벽서들은 멀리 북방의 민간 설화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중 백미는 하늘을 상징하는 천장의 돔입니다. 50미터에 가까운 높이와 30미터를 넘는 직경과 그 토대의 주변은 창문들이 원형의 테두리로 만들어져 이 웅장한 돔은 마치 천국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이고, 내부를 아름다운 빛들로 반사시킵니다. 이 휘양찬란한 돔 아래에는 원래 돔이 서기 558년의 지진에 의해 파괴된 돔을 보강하기 위해 레바논에서 들여온 코린트식 기둥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성당이 얼마나 정교하고 뛰어난 건축기술들이 필요한지를 슬며시 상기시켜 줍니다. 천마디 말보다 그림 한 점이 더 낫다고 한다면, 그 후 수 세기동안의 모자이크는, 그림보다 할 말이 많답니다. 모자이크 속에는 성서의 주제뿐만 아니라 종종 예수님과 함께 모자이크를 시주한 비잔틴 황제들도 함께 묘사되어 있죠. 그러나 크고 분명한 목소리들의 이면에는, 제 4 십자군 전쟁당시 라틴정복하의 훼손과 절도에 의해 망가지고 소실되어 온 모자이크와 우상들의 잊지못할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죠. 바닥 아래 위치한, 캠페인을 주도지휘한 베네치아 지배자인 엔리코 단돌로의 묘비의 글은 성당이, 비잔틴 재탈환으로써 그리스 정교회로 되돌아가기 전까지인 아야 소피아의 로마 정교 성당으로서의 57년을 뚜렷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당으로서의 역사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십자군전쟁으로 약해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토만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죠. 술탄 메메드 2세는 그의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용한 후에 성당이었던 이 건물 안으로 처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심각하게 파괴되었음에도 이 건축물의 장엄함은 여전했습니다. 젊은 이슬람 국왕은 즉시 이 건물을 알라에게 헌정하고 이 건물을 새 국가의 대표적인 모스크로 공표하였습니다. 다음 세기동안 지어진 4개의 뾰족탑들은 성당의 종교적 목적에 더불어 건축적 지원으로서의 기능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명백한 표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표식들도 존재합니다. 아름다운 촛대는 쉴레이만의 헝가리 정복을 연상시키고, 천장에 새겨진 원반모양의 거대한 서체는 무하마드를 추종했던 초대 4명의 칼리파들을 연상시킵니다. 화면 속 건물은 아직 모스크같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됩니다. 이 용도의 변화는, 1935년, 오토만 제국의 멸망 이후 터키를 현대화시킨 터기 첫 대통령인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이 변화는 대리석 바닥의 장식들을 가리고 있던 카펫들을 치우고 기독교 모자이크들을 덮고 있던 회벽을 뜯어낼 수 있게 한 아야 소피아의 세속화였습니다. 계속 진행되는 복구작업은 아야 소피아의 긴 역사에서 수 세기동안 침묵을 강요당하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야 소피아를 둘러싼 갈등들은 아직 남아있죠. 이슬람 시대에 덮어진 소중한 문화유산인 모자이크들의 복원은 그 위에 덮어진 회벽에 그려진 이슬람 서체들은 파괴의 과정들을 동반하죠. 또한, 무슬림 단체와 기독교 단체에서는 성당을 예전 각자 종교에 따라 본래 종교적 목적으로 다시 사용하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의 성스러운 지혜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소망하는 것은 아야 소피아에 깃든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년이 지난 미래에도 자신의 이야기들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