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프랑스 플럼빌리지 틱낫한 스님 Q&A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아를 어떻게 죽게 해야 하나요? 신(神)이 우리에게 보내는 모든것이 좋은것, 축복인가요? 스님, 저의 이름은 프란시스입니다. 부모님께서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서 따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 스님의 연속인걸 압니다. 스님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연속해 나가겠습니다. 특히 어제 배운 명상의 종에 대한 가타에서처럼 종소리를 들을때마다 깨어나고 다른 사람들도 깨어나도록 돕겠습니다. 그리고 걱정과 슬픔을 초월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다짐인데요, 그 길이 저에게는 쉽지 않을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배운 주의깊음과 지혜 들은 자연스럽게 익힐수 있는 것들임을 압니다만... 이를 위해 "자아"의 죽음이 해결책이라고 이해합니다. 자아가 죽으면 이런 모든 노력들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다짐을 지키려면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마치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 처럼요. 주위의 집단적인 추세에 어긋나는 결정 들을 해야 합니다. 물론 나의 고통과 부모님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 기도할것이며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도 압니다. 나의 밖에 있는 우주의 진정한 자연의 몸체가 내 안에 있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저는 신의 뜻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신의 뜻은 모두 선하고요. 불안증, 우울증, 건강 문제가 있을 때에도 저는 신의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건강하고, 상가(sangha)를 만나고, 가르침을 얻는 것도, 신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걸로 보지 않고 저는 그것을 자비의 길이라고 봅니다. 모든것은 자비하심으로부터 옵니다... Thay[스승]님, 상가(sangha) 여러분, 저희 친구 프란시스의 이름은 성인(聖人)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서 딴 이름이라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먼저 스님께... 어제 명상의 종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느껴서 배운대로 앞으로 꾸준히 가르침을 수련하겠다고 다짐하고, 종소리 가타 (gatha, 운문)에 나오는 지혜대로 걱정과 슬픔을 초월하겠다고 합니다. 질문의 앞부분은... 이러한 커다란 다짐을 실천하는데 "자아"가 없이 해야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생활에서 생기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어떻게 해야할지... 예를 들어, 그녀의 현재의 걱정과 슬픔을 초월 하려면 불길에 들어가는것 같은 어려운 결정들을...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 가족, 사회의 의견에 어긋나는 결정들을요. 이러한 큰 일들을 어떻게 "자아"없이 할수 있을까요? 두번째 질문은...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때 그것이 불안증, 우울증이건, 건강 문제이건, 그녀는 이것들을 신의 은총이라고 이해한답니다. 프란시스는 기독교인이라서 이것들을 은총으로 여기고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신은 그녀 안에 있기도 하고 바깥에 있기도 하지만, 신이 보내는 모든것이 선한 것인지 모든것을 선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지... 모든것이 원인과 결과의 인과(因果)에서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나 신의 세계도 이러한 인과에 속한다고 볼수 있는 것인지요.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요. 저는 자아가 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자아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웃음) '자아'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잘못된 견해이자 관념이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굳이 죽을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그 자아를 죽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아에 대한 착각은 없애야죠 현실에 대한 깊이 보기를 통해서요. 무상(impermanence)에 대한 명상 수련은, 이세상 모든것이 항상 빠른 변화를 거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러면 자아라는 관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라 함은 변함이 없는 일정한 본성을 지칭하니까요. 신(God)도 일종의 자아일까요? 신도 자아가 아닙니다. 신이 일종의 자아라면 우리 모두 자아가 있겠지요. 큰 자아, 작은 자아 등이요. 만약에 '나'라는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럼 '나'가 아닌 다른 자아들도 있어야 하겠지요. 물론 관습적인 개념으로서의 자아는 대화 안에서 사용할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 나 그리고 당신... 그, 그녀 등 사람들을 지칭해야 하니까요. 관습적인 지칭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지칭할수 있는 방법이 없으면 대화가 불가능하고 일도 못하지요. 나, 너, 이것, 저것 등은 관습적 지칭입니다. 주의할 점은 우리가 이런 단어를 사용할때 이것들은 그저 관습적인 지칭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야지요. 유용한 것들이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부처님'으로부터도 자유로와야 합니다. 한 선불교 스승님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분이 가르침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난 이 '부처님'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어 (웃음) "하지만 어쩔수 없이 그 단어를 써야돼. "그래서 나는... "'부처'라는 단어를 말할때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입을 세번 행궈야돼." (웃음) 선 스승님들은 이런식으로 이야기 한답니다. (웃음)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걸 좋아하지요. 부처님으로부터도 자유로와야 한다고요. 선 스승님들은 그들의 특유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어떤때는 굉장히 특이하지요. "난 '부처님'이란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어! "'부처님'하고 발음할때마다 "난 입을 행궈야돼!" '부처'도 단어로서는 깨끗하지 않다는 거지요. 굉장히 강한 발언이지요. 그래서, 그러던 시절에, 거기 있던 선불교 제자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 "존경하는 스승님, "저도 '부처'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부처'라고 발음할때마다 "저는 강물에 가서 "제 귀를 씻어야 합니다. 세번씩이요!" (웃음) 아주 어울리는 스승과 제자이지요. (웃음) 그들은 언어와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부처'나 '신' 같은 단어 조차도요. 모든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어를 주의없이 사용하면 진리와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의 근원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구름의 예를 기억하세요. 하늘엔 수많은 구름 들이 있습니다. 이 구름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를 만들어 냅니다. 횡적인, 수평적인 관계이지요. 한편 구름은 육지의 바닷물 등에서 온것이기 때문에 수직적인 관계도 있습니다. 내가 구름이면, 나는 바다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이면, 신(神)도 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수직적인 관계이지요. 그러니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선 수평적인 관계와... 수직적인 관계 둘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수평을 보며 수직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직을 깊이 보면 수평도 보이지요. 이러한 관념적인 생각... '수평', '수직' 등의 관념을 동시에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존재와 비존재의 관념, 선과 악의 관념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의 마음 의식이 생각의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만약 신을 "존재의 기초"라고 설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신을 관념 안에 가두는 겁니다. '존재'라는 관념에요. 신이 '존재의 기초'라면, '비존재의 기초'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니 신을 존재와 비존재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신은 '존재', '비존재'와 같은 단어를 초월한 것이지요. 부처님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올바른 견해는 존재와 비존재의 관념을 초월하는 견해라고요. 뿐만 아니라, 올바른 견해는 선과 악의 관념도 초월하는 견해입니다. 만약 신이 선의 왕국을 지배한다면, 누가 악의 왕국을 지배하나요? 신은 선과 악의 관념 둘다 근본적으로 초월해야 합니다. 그걸 보지 못하면, 신의 뜻, 신의 의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하니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신이 자비롭다면, 왜 죽음과 같은 것을 창조하였을까? 츠나미 같은 천재지변 등을... 왜 생기게 신은 내버려 두는걸까? 우리는 이렇게 착각합니다: '이것 또한 배워야할 교훈이야. 이것도 좋은거야' 반면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하죠: '좋은것은 고통을 만드는게 아닌데... '고통은 나쁜건데' 하구요. 이런 생각은 '차별'하는 마음이죠. 우리는 차별의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요. 그러니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진정한 궁극적인 차원과 만나기 위해서는, 모든 관념을 없애야 합니다.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의 관념 조차도요. 우리의 깊은 의식 (alayavijñana) 안에선 모든것이 경이롭고 순수합니다. 선과 악도 없고 존재와 비존재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 의식만이 이러한 관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는 이런 관념 들에 사로 잡혀 버립니다. 관념은 물질적 생활의 도구로는 사용할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에 사로잡혀 버리면 고통을 초래할 뿐입니다. (종소리) (번역: 한국 주의깊음 수련 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