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1년 잉카인들은 지구 최대의
제국을 통치하였다."
- 콜롬버스 이전 미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
(Charles C. Mann, 1491)
이 문명은 서구 역사상
가장 큰 문명이었습니다.
인구는 거의 천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90만 제곱 킬로미터가 넘는 영토에
이들은 거대한 행정센터를 지었고
사원, 그리고 광범위한 도로와
수로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험준한 지형 위 척박한 땅에
바퀴, 말, 철, 심지어
문자도 없이 이루었습니다.
15세기, 세워진 지
100년도 채 되기 전
잉카제국은 사라져 버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제국 통치자의 선조는
태양의 신 인티가 창조하였고
그들은 탐보 토코라고 부르는
동물에서 등장하였습니다.
형제 넷과 누이 넷을 이끄는
아야 망코는
황금지팡이가 잘 꽂히는
땅을 찾아 나섰는데
기름진 땅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모험과 넓은 탐험 끝에
아야 망코과 그 형제자매는
지팡이가 땅에 잘 꽂히는
쿠스코 계곡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 원주민들과 격렬한 싸움 끝에
그들은 수도를 건립하였고
아야 망코는 망코 카팍 즉,
잉카의 첫 번째 사파, 즉 잉카의 왕이 되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하면
이 계곡에 잉카인은
서기 1200경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1438년까지
작은 왕국으로 남아있었는데
이때 이웃부족인 창카족에게
거의 정복 당할 뻔 했습니다.
당시 잉카의 왕이었던, 비라코차,
그리고 그의 왕세자는 두려움에 도망쳤고
하지만 그의 다른 아들은 남아서
연이어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합니다.
이러한 그의 군사적 기술에, 그는
아홉 번째 잉카의 통치자가 되어
파차쿠티라는 "대재앙"을
뜻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파차쿠티는 잉카의 영토를
안데스 산맥 너머로 확장하고
대대적인 보수를 통해 왕국을
제국으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제국의 국경조직은 개편되어
"네 개의 쿼터"라는 뜻의 타완틴수유가 되어
네 개의 영토를 총독이 다스리고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잉카인들이 글을 쓸 줄은 몰랐지만
퀴푸라고 불리는 매듭으로 만든
복잡한 시스템을 사용했는데
이는 숫자나, 확실하진 않지만
다른 정보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십진법에 기초한 관료조직들은
제국의 백성들에게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세금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댓가로, 제국은 안보, 인프라를 제공하고
생계유지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필요한 경우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는
큰 창고도 지어 주었습니다.
멋진 테라스와 관개수로가 지어졌고
다른 고도에서 다양한
곡물들이 재배되어
제국의 전국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이는 파차쿠티 시대 일이었는데
이 때 그 유명한 유산인
마추픽추가 건설되었습니다.
파차쿠티의 아들인 토파 잉카는
대를 이어 제국의 군사 정복 전쟁을 하였고
결국 서기 1471년 제국의
지배자가 됩니다.
그의 통치 시기 말년에는, 제국의 영토가
남미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토파의 아들인 와이나 카팍은
1493년 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자의 원거리
군사작전은 사회구조에 부담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1524년, 와이나 카팍은
열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 조금 전 스페인 정복자들은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였는데
남미 원주민들이 저항력이 전혀 없는
질병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질병들의 발병으로 수백만이 죽었고
그 안에는 와이나 카팍과
그의 왕세자가 있었습니다.
왕세자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는 살아 남은 두 형제인 아타왈파와
와스카 사이의 내전의 불씨가 되었고
제국을 엄청나게 쇠락하게 만들었습니다.
1532년, 마침내 잉카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왈파와 그의 군대는 유럽에서 온
침략자들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프란체스코 피사로와 그의
몇 안되는 정복자들은
총과 말로 잉카왕의 훨씬
큰 힘을 굴복시켰습니다.
잉카인들은 일찍이
본 적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아타왈파는 한 해 뒤 포로로
끌려가 처형되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수도 쿠스코를
보고 경외심을 금치 못했습니다.
피사로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 도시가)스페인에 있었어도 경이로웠을 것이다."
수도가 함락된 상태였음에도
질병과 내전에 의해 원주민이
상당수 죽은 뒤였음에도
일부 잉카인들은 빌카밤바라는
새로운 수도로 후퇴하여
40년 간 항전하였습니다.
그러나 1572년, 스페인인들은 모든
항전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이와 함께 잉카의 물질적 문화적
유산들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잉카제국은 그 성장보다
너무나 빨리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