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hi: 아리스토텔레스와 삶의 목적)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몬티 존슨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샌디에이고대의 교수에요. 오늘은 삶의 목적에 대해 논해볼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ergon(기능)'논변을 통해서요 그리스어 "ergon"은 "일", "직업", 혹은 "생산물", "기능(function)"과 같은 의미였고요 인공물이나 기술과 관련된 맥락에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이를테면 톱의 기능은 자르는 것이죠. 집의 기능은 날씨와 침입자로부터 거주자를 지켜주는 거겠죠. 그리고 건축의 기능은 집을 짓는 거고요. 연관된 단어로는 "arete(덕성)"가 있어요. 이는 "탁월성"이나 "유덕함"을 의미합니다. 톱의 기능(function)은 자르는 거니까 그게 탁월하려면 날카로워야겠죠? 집의 기능은 거주자를 지키는 거니까 그게 탁월하려면 거주성과 안전성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건축의 탁월성은 좋은 집을 짓는 거겠지요. 그런데 인간에게도 특정한 기능이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인간도 그에 따르는 아레테나 탁월성이 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합니다. 그의 논변을 살펴보면 인간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움이 될 거에요. 그렇지만 기능논변을 살펴보기 전에 생명의 본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전제들을 먼저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이 네 가지로 나뉜다고 봐요 식물적, 동물적, 인간적, 신적 생명으로 말이죠. 신적 생명은 여기선 잠시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여튼 아리스토텔레스는 능력의 차이를 가지고 삶을 분류해요. 식물들은 자라고, 에너지를 사용하고 재생산하는 능력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식물이 잘 혹은 못 자란다 할때 이러한 능력을 말하고 있는거지요 그러니까 식물이 잘 자란다는건 그 뿌리를 내리고 잎과 꽃이 피고 움이 터오르고 열매를 맺는다는 거지요. 그때에 우린 식물이 번창한다 할겁니다. 그런데 식물의 능력이 방해되면 반대가 되겠죠. 이를테면 어떤 나무의 성장이 저해되었다 합시다. 아니면 잎이 시들고 덩굴이 죽어간다고 하죠. 식물학자들과 정원사는 식물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알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것들이 식물에 도움이 되고 또 어떤 것들이 식물의 능력에 관계된 활동을 방해하는지를 알겠지요. 참고로, 식물에 대해서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관점의 차이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에 관한 문제지요. 다른 종류의 식물들은 각기 다른 영양소나 각기 다른 일조량과 물을 필요로 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모든 식물은 그 능력과 관련된 활동의 객관적 근거에 의하여 잘, 혹은 못 자란다고 평가될 수 있겠죠. 동물들은 식물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는거같아요. 그들 또한 자라고, 에너지를 쓰고 재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요. 식물과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이러한 능력은 객관적으로 중요하지요. 수의사나 사육사가 다루는 것들 말이죠. 그렇지만 동물은 다른, 더 상위의 능력도 있어요. 이를테면 식물과 달리 동물은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지요. (역주: 능동적임을 의미할수도 있음) 그걸 할 수 없는 동물들, 이를테면 불구가 되었거나 우리에 있는 동물은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겠지요. 이 때문에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물에게 더 큰 우리나 생활공간을 줘야 한다 봐요 동물에게 있어서 그들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 능력을 잘 쓰게 하는것이 동물에게 더 낫다는게 명확하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동물들은 중요하게도 지각능력을 갖추고 있지요. 동물들은 더위, 추위, 냄새, 맛, 소리, 빛을 느낄 수 있어요. 어떤 동물들은 이런 능력을 다 가지기도 하죠. 자신이 속한 종에게 일반적으로 시력이 있는데 볼 능력이 없는 동물은 대부분의 동족들보다 좋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곤 하지요. 또 감각을 느낄 수 있다면 고통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욕망이나 혐오같은것도 느끼게 될텐데요. 이러한 능력들은 동물들이 능동적인것과도 연결되겠죠. 왜냐면 동물들이 뭔가를 바라면 그들은 그걸 추구할 것이고 또 그들의 자연적 활동을 방해하는건 피하려 할테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동물이 식물적 능력이 부족할때 어떤 결함을 가질거라 생각되는건 맞는데 비록 식물적 능력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움직이거나 지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 동물이 번창하고 있다곤 하지 못하겠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에 어떤 동물이 이동기관을 다쳐서 매우 아프거나 아니면 음식에 대한 열망을 채울 수 없다 치죠. 그 동물은 잘 지내지 못하겠지요. 동물이 번창한다는 것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혹은 고통보단 많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느끼는 것일 테니 말이에요. 이제 인간에 대해 논해 봅시다. 인간은 동물이란 지적은 종종 있지요. 인간은 실로 강력한 동물이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식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지요 이 말의 의미는 마치 동물처럼, 우리가 식물적인 능력도 지닌다는 거죠. 자라고, 영양섭취하고, 재생산하는거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능력도 잘 써야겠지요. 그리도 다른 동물들처럼 우리는 스스로 움직이며 감각을 합니다. 또 우리는 동물처럼 기쁨, 고통, 욕망, 혐오를 느끼고 삶의 방식을 거기에 연결시키죠. 하지만 인간에겐 다른 어떤 동물도 갖지 못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어요. 가장 중요한건 추론능력과 언어능력이겠죠. 이 능력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정이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정치적 제도에 기여하게 하며 미래를 기획하도록 하며 욕망과 바램을 수정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하며 음악과 수학을 발달시키는 한편 세계의 본성과 우리 삶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이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부분이 빠진거겠죠. 만약 누군가가 우리와 같은 종에 속하는데 동물적 능력도 갖추지 못한다면 우린 그를 동물보다 못한 상태로 보겠죠. 이런 이유에 의해서 "식물인간 상태"란 말이 있는 거겠죠. 이처럼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종들을 판단하는 기준과 유사한 방식으로 결정해 볼 수도 있습니다. 동,식물적 능력을 잘 발휘하게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도 좋은 것으로, 또 반대인 것들은 나쁜 것이라고 판단할수 있다는 거죠.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아 보면 우린 아래의 질문에 답해볼 수 있을 거에요. "음, 대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요?"란 질문에요. 우리의 삶의 목적이 가장 낮은 능력인 식물적 능력과 연관되어있지는 않겠죠? 우리가 좋은 식물이기를 염원하지 않는다면요 그러니까 재생산, 성장, 신장, 영양섭취가 아무리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잘 발휘하는게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진 않겠지요. 이는 동물적 능력도 마찬가지일거에요. 그래서 단순한 감각, 기쁨, 육체적 욕망의 충족과 같은 동물도 가질수 있는 것과 관련된 것들도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소나 돼지가 잘 번창하게 하는 것도 식물이 잘 번창하게 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번창에 있어서는 같은 정도로 무의미한 거지요. 비록 식물적인 능력들이 보다 상위의 능력이 발휘되기 위해선 잘 만족되어야 함에도 말이에요. 이처럼 이러한 목적들을 후보에서 제외하고 나면 추론능력과 언어능력만이 남겠지요. 이 능력들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능력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규정하게 했던 능력이며 이는 현대과학적으로 인간에 주어진 명칭인 "호모 사피엔스"에 반영되기도 하였죠. 구체적으론 우정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우리의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며 도덕적, 지성적 덕을 함양하고 우주와 그 방대한 곳 중에 있는 우리 위치를 관찰하는 행동들이 이런 능력의 사례일 겁니다. 이런 행동들은 우리에게 있어 최상의, 그리고 가장 독특한 능력과 상응하며,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고 우리 종의 번창을 보여주니까요. 우리에게 좋은 것들 또한 이로부터 따라나올 것이며 마치 식물에게 좋은 것은 식물학자가, 동물에게 좋은 것은 동물학자가 객관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좋은것도 객관적이겠지요. 어떤 종을 다루는 기술과 과학이 객관적으로 좋은게 뭔지에 대한 지식을 준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걸 알려주는 기술과 과학은 인류학과 철학이 되겠지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적이라고 부르기도 한 최상의 행위는 철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철학은 추론능력과 사고능력을 마치 신이 그걸 쓰는것처럼 순수하게 활용하기 때문이에요. 또한 철학은 우리의 추론능력과 사고능력을 우리의 식물적, 동물적 능력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또 우리 사람의 목적을 위해 쓰지요.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궁극 목적이라 봤어요 결론적으로, 당신은 이 영상을 보면서 행복해야만 해요 저는 당신이 어떻게 하면 당신의 최상의, 그리고 가장 신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으니까요. 잘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