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짓 하지 말아요
컷!
엘사
지금 그냥 단어만 말하고 있잖아. 대사만 전달할 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걸 전달해야지
어제까지는 이 대사가 아니었잖아요
어제는 존재하지 않아
치약통에 적혀있는 글귀가 대사라 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건 그 아래 숨겨져 있는 본질이야
좋아 다시 처음으로. 카메라
카메라 녹화 중입니다
음향
녹음 중입니다
액션!
멍청한 짓 하지 말아요
컷!
그 말투 좀 더 천천히 해 줘
더 섬세하게
그 말투는 감정에서 나온 건데요
방금 나보고 숨은 의미를 연기하라면서요
더 천천히 말하면 진짜가 아니겠지요
그럼 진짜로 천천히 해주면 되지
아 그럼 감정에 속도 제한이 있다 그런 건가?
클로즈업 촬영일 때만큼은
재밌네요, 진실성을 원하시는 줄 알았는데
짜여진 안무가 아니라
카메라 렌즈는 배우의 진정성에 관심 없어
연초점일 때 동작이 뺨 때리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러면 렌즈가 감독을 해야겠는 걸요
그럼 우리 다 집에 일찍 갈 수 있을텐데
알았어
좀 더 천천히, 더 섬세하고 진실되게, 그러면 됐지?
카메라!
녹화 중입니다
음향!
녹음 중입니다
액션!
멍청한 짓 하지 말아요
컷!
더 조용히 엘사
이건 클로즈업 씬이지, 무슨 브로드웨이 낮 공연이 아니잖아
방금 뭔 소리야?
7번 스테이지에 수탉들이 있어요
문제가 생겼어요
알았어 5분 쉬는 시간
화장 좀 다시 손보자
지금 역촬영인가요?
자기야 나도 몰라
또 만나네요
지금 역촬영을 하는 건지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서요
아니면 똑같은 샷인지
어찌됐든 혹시 모르니 화장 좀 손 봐드릴게요
정말 기가 막히게 훌륭하셨어요
로젠탈 양과 호흡을 맞추시다니
배우님한테서 눈을 못 떼겠더라고요!
피부톤 좀 빨리 정리해드리고
블러시 조금 바르고 그럼 다 끝나는 거예요
기름 종이로 유분기 조금 닦아내고
맨날 이렇게 시나리오를 덮어쓰면 어쩌자는 거야
이러면 어떻게 캐릭터에 집중을 할 수가 있겠어?
그래 알아
대사 변경에, 급한 촬영에 - 너만큼이나 나도 마음에 안 들어
아 그래요?
글쎄 난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새로운 대본을 발견하는 기분이란 말이죠
봐봐. 내가 이러는 거 아니야.
블루 램프가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단 말이야. 영화 다섯 편을 후반...
눈썹 살짝 정리해드릴게요
아 그래요. 그 위대한 블루 램프 제작사.
제가 연기도 빨리 해드릴까? 이번 주 내에 영화 세 편 더 제작할 수 있게?
더 빨리 연기하라는 말이 아니잖아, 엘사. 그냥... 더 조용하게
조용하게, 빠르게. 그 외 주문 사항은?
대화에 시간 아끼게 대신 마임 해드릴까요?
자기야, 미안해. 내 의미는 그게...
우리가 다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자기가 우리 스타인데
블루 램프가 우리를 앞서가고는 있지. 하지만 걔네들한텐 엘사가 없어
바로 그래서 우리가 일주일에 영화를 다섯 편씩 찍지 않는 거야 -
이번 거 하나에 집중하는 거지
아첨한다고 대본이 바뀌진 않아요, 알죠?
하루 이상 가는 대사를 달라고요
자 이제 팬케이크로 피부결을 균일하게
걱정 마세요, 그냥 매끄럽게만, 두껍게 덧칠하는 거 아니예요
엘사, 계속 급해지는 거 같아. 이 씬에는 긴장감이 더 필요해
그냥 단어들만이 아니라 - 그 사이 공간도 무겁게 느껴질 수 있도록
말하는 부분 말고. 말하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그리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면, 좀 더 속삭이는 말투여야 되는 거지
블루 램프도 속삭이나요?
아니면 이게 뭐 우리의 새로운 원대한 철학이에요?
우리가 먼저 속삭이기 시작하면
걔네들도 분명 따라할 걸? 작년 생각해봐
우리가 '대리석과 증기'를 냈지 -
블루 램프가 '애테나의 딸들'을 이어서 만들고
우리가 '하피의 은혜'를 제작했더니
걔네는 '날개 없는 표류'로 응수하고
우리가 '변장한 해적'을 냈더니
그쪽에서는 '변장한 어릿광대'를 공개했잖아
훌륭하네요. 그래서 뭐요?
우리가 거울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 저쪽에서는 반사에 관한 걸 만들겠죠
파우더 칠 살짝만
루즈 한 번 쓸어주고
자 다 된 거 같네요
전 이제 가서 다른 스타를 도울게요
다시 배우님한테 돌아올 수도 있어요
머리 손 봐드릴 사람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
필요하신 것 같진 않아서요
지금 좋아보여요
아무튼 아무도 안 오면 제가 머리 해드릴게요
괜찮죠?
첫 번째 조명 두 개 아직도 켜져 있어요
어떤 조명 말하는 거야?
왼쪽 스테이지, 입구 근처요
엑스트라들이 쪄죽어가고 있어요
빛 좀 분산시켜봐 그럼
그리고 또 하나: 기차 세트장에 들어갈 카펫들이요
잘못된 색으로 배달됐던데, 다시 돌려보낼까요?
아니, 그럴 시간 없어
내가 처리할게, 도와줄 사람 있어
아 그리고 음향 부서에서
마이크 숨길 공간이 부족하다고 그러던데요
이따 기차 세트장 가서
내가 한 번 보긴 할게, 근데 음향팀에 전달해
공간 확보는
그쪽이 처리할 문제라는 거, 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할게요
대본 검열 문제도 하나 있는데요
'윤곽' 얘기하는 부분에 경고를 내렸어요
웃기는 소리!
너무 암시적이라면서요,
반권위주의로 해석될 수 있다고요
그냥 스파이들끼리 사용하는 암호잖아!
암호를 뺐으면 좋겠대요
수정하지 않으면 자금을 일부
끊어버릴 거라고 그랬어요
그럼 우리가 지금 와서 어디를 잘라내길 바라는 건데?
기차 세트장이요
아니 진심이야?
그리고 또?
로젠탈 양이 저녁 식사 장면을 재촬영하고 싶어하셔요
그러시겠다?
분장실에 들어가셔서 문 잠그고
대답도 안하셔요
배우 교체해버리겠다고 가서 말해
영화 세 편 더 하기로 계약되어 있는 걸요
그건 문제 될 거 없어
아 그리고 턱 좀 그만 올리라고도 말해
무성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이제 그 시대는 갔어
블뢰미르 양 이제 리허설 준비 끝나셨어요
메이크업 중이고 헤어는 거의 다 완성이고요
근데 두 분이 동시에 들어가는 장면이라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 메이크업 담당 누구야?
애니요
애니보고 엘사 대체 좀 하라고 해
어차피 대화는 거의 없으니까
그냥 자리에만 앉아있으면 돼
그럴게요
자 다들! 다시 시작합시다, 이건 리허설이지
연극이 아닙니다
차이점이 뭔지 아는 사람들처럼 해보자구요
방의 낮은 웅얼거림이 변화한다
암청색 실크 가운을 두른 백작부인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문쪽으로 향한다
그녀는 마치 이 공간을...
내 드레스는 어디 있어요?
그러게 파란색 실크 가운 어디 있어?
파란 실크 가운이요? 그게... 한 두 시간 안에
그녀는 마치 이 공간을 소유한 양 움직이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존재감을 발산한다
말 한 마디 없이, 그녀는 방을 쓱 둘러보더니
셀린과 SW를 발견하자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아! 내가 딱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군요!
그냥 대사를 읊기만 하면 안 되지
이 사람을 찾고 싶어했던 거잖아
그게 눈동자에 담겨있어야 한다고
중요한 사람은 이 사람 하나 뿐인 거잖아 그치?
오케이
그럼요
아! 내가 딱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군요!
아주 좋아 하지만 셀린을 무시하지는 마
셀린이 방해요소라는 걸 관객들이 의심하게 해서는 안 돼
그냥... 알잖아
네
아! 내가 딱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군요!
테이블 곁에 도착한 그녀는
빈 의자 등받이에 장갑 낀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다
흠 얘기해주세요
두 분도 카이로 익스프레스를 타실 건가요?
SW
왜 물으시죠?
전 좋은 여행을 즐기거든요
그리고 이번 여행은
특히 파란만장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요
그녀는 우아한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세운다
샴페인 좀 갖다줘요 달링!
목적지가 어디든지 간에
여행은 폼나게 해야 제맛이지요
아주 좋아
아주 좋아 이제
내가 말 안 할테니까 한 번만 다시
어디서부터냐면... '두 사람이군요'
그 딱 보고어버버 -
'딱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군요'부터
그래
아! 내가 딱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군요!
얘기해주세요
두 분도 카이로 익스프레스를 타실 건가요?
잠깐! 저 조명 왜 저러는 거야?
어 하루 종일 깜빡였어요
문제 해결
자 어디서 부터 시작하냐... 그 어디냐... 맨 처음부터
그래
오케이 그래
아! 내가 딱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군요!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그래 쉬는 시간인가보군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만 할까요?
엘사!
'두드러져야 하나요'지, '할까요'가 아니야. 대사가 그래
알아요 근데 '하나요'는 너무 딱딱한 느낌이잖아요.
'할까요'가 더 부드러운데, 그게 더 낫지
안 그래요?
원래 딱딱해야 되는 거야
이 캐릭터는 좀 신랄한 느낌이지 어루만지는 느낌이 아니라고
좀 어루만지면 어때요?
사람들은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걸 기억하기 마련이죠
그냥 대사 제대로 해
알았어요
그리고 턱 좀 내리고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너무 목소리 커
지금 리허설이잖아요, 소리 녹음하는 것도 아니고
녹음은 아니지. 그래도 내 눈으로도 네 목소리가 들린다고.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엘사 지금 소리 지르잖아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윤곽이 중요한 게 아니야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그건 또 뭐야?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좀 낫긴 한데 아직도 완전히... 아 어쨌든 계속 해 봐...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이젠 그냥 대사를 괴롭히고 있네
감독님은 저를 괴롭히고 있는데요!
대사가 문제가 아니라고 엘사
그 뒤의 정신이 중요하다니까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좀 나아 근데 이젠 네 비꼬는 태도가 너무 시끄럽다
여기 윤곽이 이렇게 두드러져야 하나요?
이거 더 질질 끌다가는
다음주까지도 계속 리허설하고 있겠다
지금 기차 세트장도 이미 준비돼있단 말이야
시간이 돈인 거 알지
감독님 탓이지 내 탓이 아니잖아요!
이 스튜디오는 캐스팅 취향이 참 이상하단 말이지
그 정도만 말하죠...
그래 5분 쉬자 - 대사 쭉 연습하고 싶으면 지금 해
저기 혹시 제가 리허설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좋아요 제가 다른 파트 다 할 테니 배우님은 배우님 하시..
배우님 배역 해주세요
배경: 사설 클럽의 밤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금빛 샹들리에 아래에 깔려있다
공기는 조용한 대화 소리로 웅웅거리고
크리스털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기품있는 저녁 패션을 두른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구석 테이블에 '셀린'과 'SW'가
어두운 탁자 조명 아래에 앉아있다
자세는 무심하지만 눈동자는 경계하고 있다
자 배우님 대사예요
여기는 대화를 하기에 안전한 곳은 아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