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음성)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팀입니다. 저는 오렌지카운티에서 삽니다.
저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습니다.
저는 뇌성마비를 가진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고로 장애인이 되거나
아니면 건강하게 태어났다가 장애인이 되는 사례와는 달리
뇌성마비를 제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라는 동안 저는 친구가 없었고
제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 가족들, 제 형제, 사촌, 삼촌, 친구들은
제가 장애가 있지만 저에게 정말 잘해줍니다.
제 뇌성마비를 그들은 개의치 않아 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과 친구들과 놀다가
제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제 형제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웃집 아이들과 밖에 가서 놀 때
저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자신의 자녀와
제가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한테 뭔가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저는 손을 사용하거나 친구들과
뛰어 놀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런 상황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금방 배웠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갈 수 없었고
방문하더라도 어른들이 저를 반가워하지 않았으며
신체가 건강한 제 형제들은 기꺼이 그 파티에
끼워주는 일이 있었고 저는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여러 방식의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인종 때문에 차별을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ADA가 만들어졌을 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차이점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10대였고 막 성인이 될 때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교에 가고 조금 더 먼 거리에도 가보게
되었을 때 ADA가 저의 삶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ADA에 서명을 하고
대학에서 첫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저는 학생을 포용하는 데서 학교 정책에 급격한 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교수님들이 점점 더
장애인 학생 서비스에 관심을 가지고 저와 함께 하려고 하셨으며
시험을 볼 때 저한테 장애인학생 서비스를 통해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필기한 자료들도 주셨습니다.
대학교에서 첫 학기에 저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강의를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제가 dss에 갔을 때
그들은 적당한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도왔고
저에게 적당한 교수님들을 정해주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전공 수업을 들어야 했고
학과장님이 저를 아셔서
그 분이 제 기말고사 과제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dss로부터 훨씬 더 많은 도움이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제 교수님이 제 공부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웅변 의사소통 과목을 듣고 대학을 졸업한
말을 하지 못하는 첫 번째 학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저는 가족들과 여행을 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우리가 여행을 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들을 확인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가려고 하는 곳의 화장실을 제가 사용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면
우리는 언제나 급히 화장실을 가야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갑자기 터진 웃음)
사람들이 ADA에 대해서 생각할 때 첫 번째가 방지턱이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할 수 있는지, 보도를 지나갈 수 있는지였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
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가 장애라고 진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이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그들이 tv를 볼 때
자막을 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에게 청각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읽고 동시에 들을 때
학습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듣기와 읽기를 동시에 하면서 학습을 할 수 있는 일은
ada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교육, 고용, 의료보험같은 것들이 없다면
우리가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믿습니다.
의사소통은 저한테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대체증강 의사소통 기기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저의 일상에서 언제나 기술과 의사소통이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나이가 들면서 이런 기술은 점점 발전했다는 사실을 저는 알게되었습니다.
제가 공항에서 전화를 하기 위해서
TTY 기계를 사용해야 했을 때
저는 언제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언어를 하지 못하는 장애에 사용할 수 있는 기기가 많이 있습니다.
인구가 장애인 지역사회에 대해서 더 익숙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asl, ace 같은 다른 의사소통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언제나 볼 수 있는 한 가지 주요한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과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라면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장애인들이 많이 있고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버는 장애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ssi나 다른 종류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돕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16년 동안 교육 출판업자로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면서
저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앞으로 언제까지 일을 하지 못할지 알지 못합니다.
제 장애 때문에 저는 오직 비정규직으로만 일할 수 있고
지난 몇 년동안 제가 일을 했기 때문에
제 근로 년수에 따라서 ssdi(장애인연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저는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누릴수 있는 수당을 받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과연 공평한 걸까요?
ada 법에 따라서 정부로부터 최저생활임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어야
하고 더 중요하게는, 고용주들이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장애를 가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사회들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악관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책본부는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안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 지역사회는 다른 문제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백악관은 장애인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 이 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대통령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법에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갈 때
마스크를 반드시 써야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쓸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대안은 미국 뇌성마비 협회와 근위축증 협회
미국 자폐 협회, 그리고 다수의 다른
국가적 기관들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기관을
만들어서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돕는 일일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성과를 이루어내고
지침을 만들고, 지역사회에서 국가적으로 정보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기관들은 미국 전역에 걸쳐서 지역 사무소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봉사를 하는 일은 아주 어렵지는 않으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장소들에서 장애인들의 가정과, 사람들이 모인
곳에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미국 전역에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