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마셀 나리오 레드먼드입니다.
저는 사회 심리학자이고
히람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생물의학 인류학
프로그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장애인 편견의 원인과 결과인
장애인 차별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저의 장애인에 대한 첫 기억은 1990년대로 되돌아갑니다.
그 때 ada가 제정되고 저는 칸사스의 대학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나 ada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장애인 연구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베아트리체 라이트가 일하던 곳에서
일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녀와 수업을 하지 않았었죠.
1995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5년 뒤에
제 딸이 시에라가 척추피열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되었고
캐롤 길과 시미 린튼의 책을 읽었으며
장애인 연구와 그 범위가 무엇인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그 분야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가톨릭 유치원에 제 딸 시에라를 등록시키고 나서
몇 년 후가 되었을 때였어요. 유치원은 저희 집 근처에 있었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서 저랑 남편은 정말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학교 건물은 오래되었고
계단이 있었으며 그 학교에서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저도 모르겠으나
교육에 적합한 건물이 있었고 학생들의 권리도 보장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학교는 사립 시설이었고 ADA의 규칙을 따르는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유치원을 찾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우리는 다른 사립학교를 찾았습니다.
공립학교가 아니었지만 음악을 가르쳤고
자원이 있었고
다양성을 기반에 두고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우리는 학교에다 많은 것을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학교가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장애반이 아닌 일반 학급에서 아이가 수업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 친구들이 있었고
음악 수업을 했으며 여러 가지 절충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을 수업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체육시설과 타 시설에서
필요로 하는 도구를 갖추어놓았고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이 학교의 선생님이 되었고
유치원 선생님으로 재직 중입니다. 제 생각에
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원만히 지냈던 일은 놀라웠습니다. 그렇지만
아이에게 접근성이 부족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지 못할 거라고
낙담했었고, 학교는 원하면 언제든지 옮길 수 있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아이가 사립학교에는 못 들어갈 수 도 있었고
학교가 재정적인 문제와 장애인을 수용할 만한 법과 제도를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공립 학교를 알아 볼 수도 있었고,
집 근처에 공립 학교가 없었던
점 때문에도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그 학교에 가서
놀이터에 작은 학교 있는데 아이가 그곳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그게 마음이 아팠는데
우리가 이미 다른 학교를 알아보고 있는 동안 입학할 시기가 왔고
남편이 직장을 오레곤 주 포틀랜드 웨스트코스트로
옮길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를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새로 지은 지역에 있는
다양한 학생과 장애인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유치원에 대해서 그리 많은 지식을 가지지 않았고
아이의 기본적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했으며
아이가 학교 지역사회에서 가치있는 기여자로서
자신을 인정하고 잘 참여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기에 IEP 회의에도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연구를 더 했으며 주님께 감사하게도 기회와
자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포용할
학교를 찾은 겁니다.
우리는 오하이오 클리블랜드로 와서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모든 지역에는 가지 않았고 장애인을 잘 포용할 수 있다고 검증이 된
새로 지은 학교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앞에 길이 있고
계속 그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그래서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잘 구현하고
이행하고 감시할 수 있는
기관과 장소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런 일이 모두 가능하려면 저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다른 부모들과도 대화를 해봐야 했고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잘 아는지 그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지도 확인했습니다.
ADA는 큰 차이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며
당시 저는 장애인의 편견에 대한 이 책에서 정보를 취합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60년대와 70년대에 장애인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 같은 것들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식당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친구 집에 가거나
생일 파티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1990년 ADA가 제정되고나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특히 공적 장소와
고용 환경에서 그랬습니다.
기관에서 잘 적응하던 직원들도 있었고
장애인 직원들을 더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었고 어려움이 이전보다 줄었으며 노력을 하고 기대를 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소규모 직장과 교육기관들이
기본적인 배려를 해주지 않으며 ADA로 가능했을
많은 유익을 얻지 못한 채입니다. 사회는 너무나 다양하고
합리적이고 필요한 일을 교육이 하지못하기
때문에
시민의 권리를 찾을 수가 없고
자원도 부족하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무엇이 가치있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정보도 부족합니다. ADA는
6월에 30주년이 됩니다. 미국 여러 곳에서
이를 축하하고 있으며 30년 동안 ADA가 한
일들을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따금 불평을 하고
이따금 하는
일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가장 큰 소수자들을 돕는 데서 가장 작은 성공만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육 분야에서 일하며
장애 아동들을 위해서
정말로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일하는 학교는 규모가 작은
대학입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저는
더 보편적으로
설계된 접근법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주거 문제나 이동 수단을 이용해서 아이가 과외활동을 하는 문제에서도
최소한의 권리 이상의 것들을 획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제 딸은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지만
히람 대학교 캠퍼스에서
여러 클럽 활동에도 나갈
수 있습니다. 겨울에
추위와 폭풍이 몰아쳤을 때도
아이가 긴 언덕을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펭귄처럼 언덕을 걸어다녀야 했는데
다행히 차량이 있어서
아이를 참여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오하이오 장애인 인권 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아이가 통학하는 문제를 말했고
강추위와 폭풍 때문에
아이가 캠퍼스에 통학할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해결책은 아이를
새로운 기숙사로 들여보내는 거였습니다.
이런 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침구류를 옮기고
화장실에서 쓰는 물건들
모든 사용하는 물건들을 다 옮겨야 하고
날씨가 바뀌면 또 새로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곳에서는
가장 최소한의 권리만을 얻으며 장애인들이 살아갑니다.
제 생각에 그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으며
더 최신의 정보를 가지고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으며
불만을 제기하면 같이 해결해
주려는 사람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기관이나 사업장에
문제를 말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따금 사업을 하고자 하는 또는
학생들과 연구원들과 더 자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장애인들의 가치를 이해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다양한 프로그램과 공간을
이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과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시도를 해야 할 수 있으며
문서를 제출하고 여러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사람들에게 어떤 편견이 있는지
어떤 차별이 있는지를 정식으로 전달해야 하며
어떤 때에는 ADA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학교에서도
많은 활동을 해야 얻어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적당한 문서를 만들어 제출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게 뭔지
보여줄 수 있는지,
수업을 듣고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애인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문을 먼저
두드리고 불리한 상황에 있다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좀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연구를 더 했을 때
우리가 얼만큼 더 멀리 갈 수 있는지
아직 몰랐기 때문에 많은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ADA가 이행이 되고
법이 통과되었을 때
그 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직 몰랬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모으고
내부자가 되어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며
입법의 가치를 증거해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편견을 가지고 볼 수 있고
그러나 저는 그런 시선이
ADA의 의도를 이행하는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마다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차별을 받고 소외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능력이 법적으로 정해진
것보다 더 부족할 수도 있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충분히 잘 제기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으며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배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직장에 지원을 해야 한다면
성명서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주요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있다는것을
알게 해야 하고 장애인이 맞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하며 승인을 해주는
사람들이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장애인으로서 당신을
채용해 줄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이따금
지원자가 정보를 사용해서 지원했더라도
사람들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확인하고 증명해야
할 것들이 계속해서 있을 수 있습니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업주로부터
거절을 당할 수 있고
ADA 법안 중 어느 부분이 침해가 되었는지
정확히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어려울 수 있지만 용기를 내서
계속 시도해야 하고
접근이 가능해질 떄까지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적절한 이동수단같은 것도 있어야 하는데
캠핑을 가거나 해변에 갈 때도 필요한 것들입니다.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야 할
때가 있는데요
저는 그렇게 해야 할 때 활동주의 책들을 통해서
장소를 물색하고
장애인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데 필요한
모임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장애인을 위한 운송 수단을 이용할 수도 있었고
손에 많은 물건을 들고 옮겨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때 휠체어의
누르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직장에서 일해야 하고
ADA를 통해 장애인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른 유익한 일을 해야 합니다.
최근 저는 장애인의 투표권을 두고 연구 중입니다.
장애인들이 투표권을 가질 권리를 제한 받고
있으며
다른 기본적인 인권에서도
소외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선거가
치러졌고 여러 사람들이 선거를 더 잘 치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앨리스 옹(Alice Wong)의 <투표를 더 쉽게하기cripthevote>를 해시태그 해주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 후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의회 의원들을 더 잘 뽑기 위해 노력하며
지역 캠페인들에서도
ADA의 가치와 장애인 인권 문제가
잘 지켜지는지 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선거에서 견인차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선거에서 소외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장애인들은
보조 기술을 사용하지만
전자 기기와 호환이 되지 않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거나
장소에 접근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기관에 입소되어 있어 나갈 수 없거나
여러 이유로 투표를 못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선거진행위원회 센터들이
연구를 진행했고
60%도 넘는 장애인들이
접근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편으로 선거를 하면
미래에 다수의 장애인이 투표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두 번째 큰 문제는
이 문제는 저 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문제에 속하는데,
어떻게 ADA가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과 기관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ADA 법안이 2009년에 개장되었고
장애인들을 도와서 더 나은 직장을
찾게 해주고 소외되었을 경우 소송을 가능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관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수감되고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대다수의 시각장애인과 다른 장애인들이
감금되어 있으며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갖혀지내면서 필요한 것들을 얻지 못하며
그렇게 갖혀 지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오해해서 가두어 둔 것이고 말도 안되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도 시작할 수가 없는 환경입니다. 경찰들에게도
이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고 대중에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관에 수감되어 자유를 억압받는지
일깨줘 주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들은 삶에서
자유와 생산성을 잃었고
사회는 그들이라는 자원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흑인의 삶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대해서 생각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게 기회도 부여해 주어야 합니다.
제 생각에 모든 종류의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모여야 하고
힘을 모아서
소중한 사람들을 함부로 경찰이
가두게 하는 관행을 막고 기관에 갇힌 사람들을
풀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장애인이
유색인종이고
여성이며 감금되어 있는지
알아내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 문제에서만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말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고용 문제에서도 분명히
장애인들이 많이 소외되어 있으며
그 일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관에서
그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사회가 이용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취업시킬 수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장애인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자원이며
가장 창의적인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그들이 있는 자리까지 오기 위해서
여러 측면에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어려운 경험을 했기 떄문입니다.
그들은 접근성이 어려운 세계에서 접근성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했고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정책은 어떻게 찾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다시 회복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문제를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편견과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육해서 보게 해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흥미로운 순간이 존재하며
반인종차별주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렇습니다.
이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고
교육 기관 같은 면에서 사람들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이브람 켄디의 책을 많이
읽고 가르치고 있으며
어떻게 반인종주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인종에 근거하여 언제 편견과 차별이 처음 존재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주의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이 문제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다수의 억압에 직면한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과 생각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제가 다니는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저희의 정책이나 요지가 차별적인지 아닌지 정책을 검토합니다.
또 채용 정책에서
의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장애인을 채용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는건 아닌지
확인합니다.
제가 다음 단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말할 때
그들이 그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장애와 편견에 직면한
사람들과 직접 만남으로써
사람들의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압니다.
만남을 통해 그들은 장애인 개인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고
편견이 잘못된 견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장애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도 배웁니다.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먼저 듣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고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계획을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권리를 뺏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문헌에서 우리는 이렇게 써서는 안됩니다.
"이봐요 당신 정말 나쁩니다.
당신이 지금 한 말은 인종주의적이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올바른 논지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이 일을 할 수 있고
어려운 대화이지만 그 대화를
계속 시도해야 하며
주거와 지역사회, 학교,
기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용감한
대화를 시도해서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정책이고 그들의
권리가 무엇인지 우리 직원들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ada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회의를 해야 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정보를 찾고
도움을 구할수 있는지 알게 해야 합니다.
만약 부모들이 학교에서 열리는 IEP 회의에
참여하고, 아이들에게 적절한 수단을 가능케 해준다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따금 장애인들을 위한 기관에 대해서
너무나 불친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일부의 이권만을 옹호하고 있으며 이기적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장애인의 인권을 특별한 이권이라고 볼 때
우리는 무조건 그 요구들이 충족되어야 하는
시민권이라고 보는게 아니고 훨씬 더 투명하고 공정하게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웹사이트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접근성을
가져다주는 역할도 하지만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알게 하고 사람들이 먼저 요청할 수 있게 도우며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나쁘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경멸할 때도 있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는 "장애(handicap)"라는 단어를 두고
그들의 손에 "특별한" 것을 쥐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에요.
그들에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있고
당신은 그들이 어떻게 성관계를 맺는지가 중요한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세요.
당신 말씀이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어요.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될 수 있고요. 저는 지난 24년 동안 장애인을 돕기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저희 아이 때문에 가정에서 많은 것을 바꾸어야 했고
어떤 집을 사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부터
많은 것을 생각해서 아이가 우리 가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부엌과 화장실도 아이가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했고
세탁실을 만들 때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의논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가 어떻게 하면 창고에 잘 갈 수 있는지 의논하고
냉장고에 어떻게 음식을 넣으면 좋을까도
열심히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 가족 중 누가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거나
선천적 장애가 있는 채 태어났다면
아니면 사지가 없는 가족이 있다면
분명히 선반에 물건을 두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가 물건을 잘 꺼낼 수 있을지
하나하나 생각할겁니다. 장애가 있지 않은 다른 아이도
언제나 그렇게 하고, 아이가 간식을
먹을까봐 항상 간식을 손에
잘 닿을 수 있는 곳에
두곤 합니다. 아이가 와서
"엄마 맨 위 선반에 있는
과자먹으려고 하는데요."
라고 말하면 당연히 기다리게 하지 않고
기꺼이 아이를 위해서
선반에 있는 과자를 가져다 줄겁니다.
아이가 가정에서
결코 소외된 사람이 아니라는걸 가르쳐주어야 하죠
우리는 장애가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사정을 가진 다른 부모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하죠.
그러면 그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거에요.
우리 지역사회가 이런 이들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게 될 것들이
더 많아질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의견들 가운데 부정적인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두려워하지만
그런 의견들을 직접 제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또 소외시키게 될지도
모르며 더 나아질 수도 없게 되는거죠.
사람들은
감사해 할줄 아는 존재입니다.
가족 중 한 명이 장애인이라면
그 가족들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우리에게 장애인 가족이 있기는 하지만
할수 있는게 많고
지침들을 살펴 보아서
올해 할 수 있는 일
내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주변의 장애인들도
더 많이 도울 수 있으니 감사하네요. 학생들에게는
조언자가 필요하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는거죠.
그들에게는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이웃이 더 필요하고
무엇이 가능한지 알게 될테니까요.
저는 제 딸한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 딸은 유치원을 잘 다니고
결국 대학교에 들어와서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잠시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새 직장을 얻기 위해 다시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력서를 넣었고
코로나가 진행 중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이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제 딸은 많은 면접을 보았고
여러 곳에서 아이와 함께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아이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유치원에서 저희 아이를 뽑고 싶어 한다면
아주 많은 학생들이 그녀를 좋아하게 될거고
그 이유는 그녀에게 장애를 어려움이 있다는걸
모두 알지만
아이가 유치원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거고
사실을 보여줄 수도 있는거고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도 제 딸에게
여러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이 되고 부모가 될 수 있으며 학습자가 될 수 있다는
기꺼이 오고싶어할거라고 말입니다. 제 딸의 존재 자체가
희망의 증거이며, 아이를 고용하게 되고 함께 일하는
모두가 아주 운이 좋다는 사실을 그들이 배울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