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케빈을 처음 만났을 때는
교생 실습 첫 날이었죠.
1교시 였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저는 다가가서 케빈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고개를 들라고 했어요.
케빈은 그렇게 했죠.
그리고 작정한 듯한 말도 했습니다.
"제길 다시는 건들지 마"라고요.
저는 20살이었습니다.
영어교육 전공으로
봄학기를 끝낸 상태였죠
케빈은 18세였고,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몇 주간 교생 실습이 지났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케빈은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죠.
저는 케빈의 일상의 무료함을 인식했고
그것은 매우 대조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했을때요.
그들은 생기가 넘쳤죠.
엉덩이 때리기 게임도 하고.
저는 젊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즐거웠어요.
행복한 모험이었죠.
저는 쉬운 판단을 내렸죠.
저와 케빈 사이에 벽이 있고,
그것은 일정부분
케빈 책임이라고 말이죠.
결국 케빈은 가장 난처한 아이였어요.
그는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고립시켰어요.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끝내고
복도에서 서 있었는데요.
케빈이 지나갔어요.
불현듯 제가 물었어요.
졸업하면 뭐 할거니?
무엇을 할거라 생각하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말야.
또 다시, 매우 작정한 듯이
그는 말했어요.
그것은 제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죠.
"저는 감옥에 갈거에요."
"거기서 이발 기술을 배울거에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삼촌 이발소에서 일할 거에요."
저는 거기 서 있었고,
케빈은 걸어나갔어요.
고등학교에 있는 밝은 조명 아시죠?
복도도 아시죠?
저는 할 말을 잃었어요.
어떤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어떤 사전준비도 없었고
그런 대화에는 속수무책이었죠.
그리고 제가 기억하길
처음의 즉각적이고 당연한 반응은
어떤 사람도, 저의 학생 누구도
마땅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래 모습에서 감옥을 그리기에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한 후에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케빈과 저 사이에 벽이
케빈과는 훨씬 덜 작용하고
시스템과 더 크게 작용했다면
학교, 교사, 저와 더 크게 작용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2개월 동안,
2개월 동안 전 경험했죠.
이 어른 친구와 관계형성하는 것이요.
나이를 볼 때, 그는 친구 뻘이죠.
저는 20살이고, 그는 18살이니까요.
저는 관계를 맺어가기로 했습니다.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는거죠.
그런데, 이해하셔야 할 부분은
그건 교사의 전략은 아니었습니다.
이타심의 행동도 아닙니다.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거의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이
정반대의 길에 존재할 수 있을지.
그 길은 절대 마주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만약 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그 특정학교에 배치되지 않았다면,
케빈과 같은 학생을
운좋게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죠.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합니다.
케빈이 저와 함께 나눈 경험과 이야기가
너무 흔하게 인종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젊은 친구들이
학교에서 겪는 것들이죠.
저의 깨달음 여정에 첫 번째 단계는
개인이 지닌 진실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겪는 경험은
저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젊은 교사로서
매우 멋지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제가 베테랑 교사로서
그 사실을 다시 인지하지 못한다면
제가 교실에서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학생들은 흔들릴 것 입니다.
여기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점수가 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나 평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교 분위기를 만드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사의 책임은 말입니다.
아이들이 위험을 받아들이는
동기부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실을 말하고
그렇게 할 때,
안정감을 느끼도록 말이죠.
그러나 간혹,
참여보다 침묵을 택하는
젊은 친구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기존에 겪어온 반응이
무관심이거나, 바로 잡아주려 하거나,
심지어는 공격적이기까지 했던거죠.
시스템적인 인종차별 때문에,
우리 학교가, 문화가, 국가가
병들어가는 겁니다.
교육자로서 저의 일이자, 여러분의 일은
매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균등하게 교육받도록 할 수 있을까요?
편향된 의견과 은연중에 포함된 편견들,
그리고 상처주는 행동들을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특히 저와 같이,
저와 같은 사람들이,
즉, 백인 여성 교사들이,
일단, 우리나라는
백인 여성 교사가 주를 이루고,
바로 우리 자신들인데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안전한 환경에서
긍정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성장하며
또 교실에 있는 모든 순간에
존중받는 그런 환경 말입니다.
이 질문에 간단한 정답은 없습니다.
"지혜를 주는 101가지 이야기"
따위는 사실 저에게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찾죠.
쉬운 방법을요.
그런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건 이야기와, 경험입니다.
그것들을 다시 찾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죠.
특히 그 순간들, 처음의 깨달음을요.
제가 하고 있는 것을 믿는 이유가,
제 나름의 방식이 빛을 발한 때 말이죠
그리고, 교생실습이 끝날 무렵
제 아름다운 아이들은 교내식당에서
파티를 해주었어요. 정말 멋졌죠.
훌륭했고, 사랑과 진정함을 느꼈습니다.
타코 딥도 있었어요.
빠진 사람이 있었죠.
케빈, 케빈이 오지 않았어요.
저는 대단히 실망했죠.
그는 메모를 남겼어요.
이렇게 말이죠.
메모를 받자마자 두 가지를 깨달았어요.
하나는 가르치는 것이 내 일이라는 것,
제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요.
그 일로 저는 더 나은 친구가 되었고
더 나은 동반자가 되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죠.
더 나은 엄마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제대로 사용하면 "제길"이
정말 시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케빈이 상대적 진실의 가치를
저에게 깨닫게 해주었다면,
그 진실의 이유를 인식하도록
도와준 것은 애슐리입니다.
애슐리를 소개하니, 정말 흥분되네요.
애슐리가 10학년으로 들어왔어요.
애슐리는 절대적으로
영광의 15세 였어요.
매사에 훌륭하고, 열정적이며,
에너지가 넘쳤죠.
배움에 의지가 컸고,
생기가 넘치고, 그냥 멋졌어요.
이런 친구들 있잖아요.
그 해에는 그녀가 저에게 배운 것보다
제가 그녀에게 배운게 더 많았습니다.
2년 후에 애슐리가 교실에 들어왔어요.
졸업에 2단계 가까이 간거죠.
더 많이 알고, 성숙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더 많은 준비가 되었죠.
애슐리가 고등학교 주차장에
주차한 그 날,
휘날리는 남북동맹기가 있었어요.
애슐리의 반 친구 차 뒤에서 말이죠.
범퍼에 매달린 끈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 젊은 친구인
애슐리는 행동을 취하기로 했죠.
애슐리와 친구 몇명이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연대 상징으로 빨간 티를 입었어요.
총무부에 메세지를 보내고자 했죠.
신속하고 적절하게 행동해야 했어요.
매우 자유롭게 전달되는
증오에 찬 메시지에 맞서기 위해서요.
시위하는 당일
시위에 함께하는 많은 젊은 친구들이
제 방에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첫 학기였고,
또 다른 첫 경험이었죠.
아이들이 들어왔을 때,
전 그들의 분노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들었고,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전 결심했죠.
그건 그런 순간이었어요.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순간 말이죠.
저는 제 창의적인 교습안을 버리고
들어가서 그냥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솔직히 말할 수 있는데요.
저는 거의 듣기만 하고, 어린 친구들이
상처, 분노, 좌절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거의 끝날 무렵에는 말을 하긴 했죠.
저는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어요.
내가 총무부에 가서,
그들 앞에 설 것이다.
그들이 옳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때, 애슐리가 손을 들었어요.
또 다른 진실이 전해졌죠.
전 그다지 준비되진 않은 상태였어요.
그녀는 말하길,
"포쿠치 선생님, 감사하긴 한데요,
유색인을 신뢰하듯이
선생님을 신뢰할 수는 없어요."
음. 알겠더라고요.
아마 처음에는 아니었지만요.
그러나 제가 아는 바로는
애슐리는 제 방법이 그 상황을
해결할지 믿지 못했던 거죠.
왜냐면 그 증오의 메시지로 인해
그녀가 받은 상처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백인 정체성이 저를 보호하니까요.
지금은 그 때의 감정을 극복했습니다.
처음에는, 음, 잘 모르겠네요.
극복한건지, 지금도 가끔 떠오르니까요.
그러나 처음 그 순간,
상처받았고, 당혹스러움이었어요.
애슐리는 25명 학생들 앞에서
말했거든요.
그러나 저는 애슐리가 상처를 주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악의를 품고 말하지 않았어요.
본인이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말했고,
그 감정을 공유할 자격이 있었어요.
내 교실에서, 우리 교실에서,
우리 학교에서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 나라에서요.
그녀는 그것을 공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애슐리의 관점에서
그 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궁금해졌어요. 몇년동안
교실에서 앉아있는게 어떤 느낌인지요.
앞에 있는 백인 사람과 함께 말이죠.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녀의 맘 속에
그들이 최고 관심 대상인지 말이에요.
그런 일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기에
저는 대학원 재학중이었어요.
작문 및 서사로 석사 취득 중이었죠.
그 때 베테랑 교수님이 계셨는데요.
그 분은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남부에서 자라온 시절에 대해서요.
볼드윈과 엘리슨도 공부했는데요.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인문과 문학이
인종주의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요.
만연한 인종주의, 백인 특권,
은연중의 편견들 말이죠.
저는 이해가 필요했죠.
지금도 그렇고요.
애슐리가 저에게 말한 것의
이면에 있는 이유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제 반응의 이유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고,
동료들과 재미있는 경험을 해왔죠.
일부는 제가 한 것을
감사해하기도 하고,
일부는 감사하지 않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 제가 다시 돌아가는 것은
그러한 순간들입니다. 교육자로서,
우리가 정보를 전달하면,
그것이 인식이 되고,
그리고 수용 되는 것,
그리고 공동체나 가족으로 가서,
관점의 전환을 보는 그 순간입니다.
제 교실은 아이들이 활기찬
그런 공간이 되고,
저는 이 일에 계속 매진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된 진실이
가끔 불편해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 편견을 불식시키고,
싸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노골적, 비노골적인 편견 말입니다.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인종적 장벽은
바로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긴 하지만,
몇년 전 케빈이 저에게 준 방법은,
정확히는 25년 전이죠.
케빈이 저에게 알려준 방법은
경청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봐야 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하면
즉시 편견을 없앨 수 없겠지만,
그 편견에 균열을 낼 수도 있어요.
틈이 갈라지면, 무너지게 되고
무너지면,
애슐리의 미래, 케빈의 미래는
공간과 방으로 문 열고
나오게 될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소양을 갖추고,
문화적으로 역량있는 교육자와 함께요.
그들은 기쁨과 공감으로 수업하고,
학문적 도전과 열정을 갖고
모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방식으로 말이죠.
결국 총제적으로 모두 상생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이 교훈으로 상생하는 겁니다.
저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를 알려드리죠.
저는 몇달 전에
애슐리에게 전화걸었습니다.
"얘야, 나는 여전히 우리 둘 사이에
그 순간을 떠올리곤 한단다.'
이것에 대해 말해도 되니?"
"그럼요",
애슐리가 제 반을 방문했어요.
애슐리는 지금 그녀가 빨간 티를 입고
제 교실에 앉아있던 그 당시의
제 나이와 같은 나이에요. 32살.
예쁜 아이 두 명을 데리고 왔어요.
한명은 뱃 속에 있고요.
우리 둘은 교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울었어요.
애슐리에게 그 순간을
기억하는지 물었을 때,
그녀가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 날이요.
제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아니요. 선생님,
선생님이 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 진실을 나누려고
했던 것은 기억나요."
애슐리와 저 사이에 존재했던
인종적 장벽은
그녀가 졸업무대를 걸어갔던 그 날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시인이자, 신앙인이고,
치유자입니다.
변호사이자, 엄마이죠.
오늘 여러분에게 이 얘기를
할 것 같다고 애슐리에게,
해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물론이죠, 말하셔요."
라고 하면서
제가 그녀의 진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었어요.
여러분이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제길스러울 정도로 시적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