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적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이 말을 뒷받침하는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증거들을 많이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성은 아나키스트를 정의하는 특징이 아니다. 리버럴, 보수주의자, 기독교인을 폭력성으로 정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들이 더 큰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나키스트들이 100년 이상 폭력적으로 묘사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지배자들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생각은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폭력'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즉 그들은 우리의 행동과 신념을 반사회적이고 두려운 것으로 묘사하였던 것이다. 폭력에 대한 혐오는 타당한 것이다. 도리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폭력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사실 그것이 대부분 아나키즘 관행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폭력에 대한 능력은 인간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이 능력이 우리의 상호부조의 본성과 결합되어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동물의 왕국에서 왕이 될 수 있었다. 자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가혹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대항해서 말이다. 그러나 수천 년 인류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복잡한 사회와 경제체제는 여전히 거대한 폭력의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아무튼... 그래서 폭력이 뭔데? 그리고 그게 아나키와 무슨 관계인데? 폭력에 대한 정의는 일반적이면서 너무나 광범위한 단어이기에 그것에 대한 답은 굉장히 다양할 것이다. 우선, 한 사람에게 폭력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폭력은 일반적으로 다른 이에게 충격이나 고통을 주는 행동으로 이해된다. 종종 폭력은 다른 이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기 위해 직접적인 무력을 동원하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사실 그것은 간접적일 수도 있고, 위계를 통해 전달될 수도 있고 규칙의 임의적인 조합에 의해 표현될 수도 있다. 즉 폭력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많은 경우 그것은 혼합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폭력이라고 하면 물리적인 힘의 사용이나 위협을 떠올린다. 얼굴에 죽빵을 꽂는 형태든, 총기난사든, 가정폭력이든, 혹은 살해 협박이든, 강간이든, 무장강도 사건에 대한 선정적인 뉴스보도이든, 전술 논쟁이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폭력의 영역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했을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고. 어떤 것이든,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게 어떤 건지 대충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충격을 식별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폭력은 과거의 트라우마 경험과 연결되어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과 두려움은 인간집단을 고립시키고, 범죄화시키고, 비인간화시키고 억압하는 데 사용되는 (국가권력의) 기초적인 토대로 작동한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선택적인 이미지는 무기화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안전과 안보라는 핑계를 대고 억압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다. 안티파는 테러집단인가요? 뉴욕시의 경찰국장이셨던 우리 Burnie Carrick씨는 테러방지 TF를 주도적으로 만들었었죠. 국장님은 안티파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고정관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아마 이것은 실제 현실과 다르게, 위험을 과장시키거나 존재하지 않은 위험을 가짜로 만들어낸 형태일 것이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은 대충매체를 장악하고 국가의 권력기관들을 통제하는 지배자들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이러한 고정관념들은 그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과 문화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그것이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패륜범으로 선동하고 국가권력의 폭력을 필요악이라고 미화시키는 데 이용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왜곡된 시각은 국가권력이 세계에 일어나는 폭력사태에 대해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국가권력의 과장된 신화와 미신을 벗겨낸다면 우리는 국가권력이 애초에 폭력의 고도로 조직화된 형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폭력의 앞잡이들인 경찰과 군인 같은 국가권력의 하수인들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가학적인 개인이나 테러리스트의 능력과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아나키스트의 폭력성과도 비교를 불허한다. 아나키스트들이 유리창을 깨거나 네오나치들에게 죽빵을 꽂는 게 도시를 폭격하고 사람들을 고문하는 국가권력의 만행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식민지 인민에 대한 학살과 핵전쟁의 위협이 어떻게 짭새와 지배자를 암살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국가권력의 폭력은 정치인들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신성한 가운으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필연적인 권위로 미화된다. 그러한 제도들은 '자유시장'의 폭력을 옹호함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고, 우리가 임금노예냐, 굶어죽느냐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면서 우리의 인간성을 유린하는 데 이용된다. 이러한 시장의 신성한 논리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국가는 상상 속의 선(국경)을 넘으려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흐름을 가두고 규제한다. 국경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소노라 사막의 갈라진 바위와 지중해의 어두운 깊이에 희생되고 있으며(*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빈약한 수용소로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이러한 국가권력의 만행에 맞서 우리는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야만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완고한 평화주의자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자기방어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하다 여긴다. 왜 그러한 정당방위의 원칙에 국가권력의 폭력은 예외가 되는가? 방어적 폭력의 정당성을 키우는 것은 혁명 전략의 핵심 요소이다. 그러한 방어적 폭력이 우리를 억압하는 압제자와 기관들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했을 때에도 말이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이것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예는 항상 합법적인 자기방어의 상태에 존재하므로 압제자에 대한 노예의 폭력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고통의 유용성과 경제성의 기준에 의해 조정되어야 한다. 범아프리카 혁명가인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 인민들이 식민지 지배자에게 대항하는 폭력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며 식민지 인민들이 인간성을 발견할 때, 그들은 승리를 위해 무기를 다듬기 시작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은 캐나다와 멕시코의 지배에 저항한 카네사타케의 모호크 족이나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와 같은 원주민들의 무장투쟁을 볼 때 명확해진다. 그것은 세상의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모래에 선을 긋고 방어할 준비를 할 때에 명확해지는 것이다. 폭력이 종종 현실 세계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따라서 그것을 가능한 최소화하고 피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야겠다. 폭력은 낭만화되거나, 기념되거나, 공허한 미학으로 바뀌거나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전문가들이 반란운동에 대해서 분석했을 때 그들은 사회적 관계의 끈끈함, 조직화 방법, 갈등을 확산시키는 방법 등이 어떤 특정한 전투의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이를 인식해왔다. 이러한 것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폭력을 거의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폭력은 자율성을 주장하고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의미있는 자율성은 비폭력 전술에 매달리는 '진보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아나키즘과 모든 혁명적 과업의 기초를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