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 피트먼: 저는 미국 문화가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러니하게도
또는 기이하게도 그 혼란속에서 오히려 살아가는 힘을 얻습니다.
저는 엄청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특히 로스엔젤레스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미학과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통제할 수 있고
미학적 코드가 강하게 정립된 문화적 환경보다
훨씬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곳은 여전히 개척지처럼 자유로워서
저는 원하는 방식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그림 앞에서 섰을 때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들이
실제로 보고 있는것에 휩쓸려 빠져들게 되길 바랍니다.
그림 속 모든 것이 가짜이고 인공적이지만
그들은 멀리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제 작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에를 들어, 택배 기사나 정수기 기사분이
제 스튜디오에 배달을 오셨을 때,
그분들이 작품을 보고 즉각적으로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면
항상 흥미롭고 기쁩니다.
'하이파이브'를 하지 않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동시에, 제 작품이 더 깊이 있는 비평적 영억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또 다른 유형의 관객을 필요로 하며,
더 높은 수준의 시각적 문해력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작품은 특정한 계층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요소와 엘리트적인 요소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지중해적 정서가 강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햇볕이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서 태어났지만,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콜롬비아에서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콜롬비아 출신이시고,
아버지는 미국 남부 출신으로
개신교 신앙을 가지셨습니다.
저는 모순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하이메'라는 애완 닭을 키웠습니다.
콜롬바이에서 이모님이 시어즈 백화점에서
사주신 닭이었죠.
그러다 저희 가족이 적도 근처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이메를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비행기 기장님께 닭을 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비행기를 타도 되는지 여쭤보셨고,
다행히 허락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께서도 칼리에서 저희와 함께 지내셨는데,
저는 하이메를 위한 여행용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끼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조끼를 입은 하이메가 너무 자랑스러워고, 그 누구도 저를 놀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와 함게 계셨고, 저는 여행용 옷을 입은 제 닭을
무릎 위에 올려둘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 덕분에,
저는 어린시절부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의 표현을 제한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제 감각이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 작품속 장식적 요소가 자연스럽게자리 잡게 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그것이 정말 마음껏 피어나도록 허용되었고, 제한되거나 억제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저는 제 삶이 굉장히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점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제가 현실을 잊지않게 해주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만연한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와
차별적인 법안들이 그 중 하나입니다.
저는 충분히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저를 깨우쳐주고
저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저는 회화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놓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아마도 동성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깊은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무언가를 고치고 다듬는 것
사물을 바라보고 개선하는 일종의 봉사적 요소 말입니다.
1970년대에 회화는
거의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로웠습니다.
'이걸 내가 고쳐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이 그림의 영감은 멕시코의 '레타블로'에서 왔습니다.
레타블로는 주석판에 그려진 종교적 회화로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유행했습니다.
저는 익명의 화가들이 그린 레타블로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미술에 매우 강한 매력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은 보통
성인의 고통이나 순교,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종교적 이미지를 세속적인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작은 회화에서 제 그림의 색조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불안정한 색감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레타블로에서 영감을 받아 왔지만,
그보다는 회화 기법과
장식적인 기법에 더 집중해 왔습니다.
레타블로의 표면을 장식하는 이러한 기법을
저는 20년 넘게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형상(figuration)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저는 산책을 하며 우리가 심은 선인장들을 자세히 관찰합니다.
정말 면밀히 들여다보죠.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거나 구성하는 대신,
매일 아침 제가 보고 있는 특정한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에서 아직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배경을 보고 있으며, 여러 개의 명사 목록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형용사 목록도 존재합니다.
명사들이 모두 형용사에 의해 수식되고 있지만
언어적으로 이 그림에는 아직 어떤행위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작년에 뉴욕에서 전시했던
그림들을 포함해, 제 모든 그림에는 항상 일종의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적인 요소나 애니미즘(animisn)이 존재합니다.
그림 속 장면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죠.
분명히 이 그림의 특정한 영역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간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효과를
너무 극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미줄을 추가했습니다. 마치 그 효과를 부드럽게 제어하려는 시도처럼요.
거미줄은 이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이지만,
아직도 '동사'의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그림에서 '동사'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선인장의 가지를 활성화시키는 방식으로 동사가 표현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다소 비유적인 방식이 되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제 개인적인 삶의 요소가 작품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억지로 막으려하지 않습니다.
정원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요.
저는 자연 자체보다는
조경(landscaping)을 선호합니다.
자연의 혼돈과 폭력성을 조금이라도 제어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인장과 다육식물 위에
일종의 합리적인 조경 구조를 덧씌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주의적 방식에 그다지 열중하지 않기 때문에, 정원은 매우 의도적인 매너리즘을 갖고 있습니다.
선인장은 대체 구조물이며,
정원 자체가 하나의 복합적 은유의 표현이 됩니다.
정원을 가꾸면서 정원사가 경험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입니다.
왜냐하면 식물의 삶과 죽음이
매우 밀집되고 압착된 방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정원을 가꾸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원을 가꾸면서 그에 대해 조금 더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것은 점점 더 강조되고 요약된 삶과 죽음의 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