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동반자가 수련에 관심이 없는데
저는 어떻게 수련을 지속할수 있을까요?
영성(spirituality)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살면서
어떻게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저는 Dharmacharya가 되고 싶은데
그 사람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럴때 저는 어떻게 수행에 대한
열망을 유지할수 있을까요?
"저는 Dharma(가르침)를 수행하고자 합니다만...
"예를 들어 다섯가지 주의깊음 수련들을요...
"하지만 저와 함께 사는 사람은
영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떻게
안정적으로 수련할수 있을까요?"
내가 사랑스럽고,
내가 참신함을 유지하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존중을 받는다면,
내가 무엇을 하건 그사람에게
이해를 받을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사람에 대한 모든걸 사랑하게 되니까요.
그게 자연스러운 경향입니다.
영적인 삶도 우리 일상의 행위
하나하나에서 실현할수 있습니다.
굳이 "나는 영적인 사람이야"하고
선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도망갑니다.
반면 차를 마실때 주의깊고
평온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거기에 주의깊음, 집중력, 통찰력이 있으면,
차 마시기 자체가 영적인 것이 됩니다.
평온함, 행복, 기쁨이 자연스럽게 발산되는거지요.
그러면 그게 영적인 겁니다.
굳이 말로 "난 차를 영적으로 마시고 싶어"
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웃음)
말은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다섯가지 주의깊음 수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의깊음 수련을 수행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 다섯가지 수련에 맞추어서
일상 생활을 하면 됩니다.
거창한 이름은 없을지 몰라도,
그게 진정한 수행입니다.
내가 불교수행자라고
"나는 불교수행자다"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거지요.
나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조용히 수련을 잘 하고,
내가 행복하고 활기차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사람이 와서 물을 겁니다:
"당신, 정말 존경스러워,"
"그런 상황에서 나라면 당신처럼
그렇게 잘 행동하지 못했을텐데"
그때가 바로 여태까지의 수행을
정식으로 알릴 때입니다.
하지만 먼저 수련을 하세요.
본인이 가르침 그 자체가 되세요.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언젠가는 함께
수련생활로 들어올겁니다.
중요한건, 본인의 수련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는겁니다.
너무 수련을 형식적으로 하지 마세요.
어떤 수련자를 보면 걷기 명상을
너무 눈에 띄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걷기명상 수행을 한다는걸 과시하고 싶어해요.
그러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웃음)
반면 어떤 수행자는 걷기명상을
깊이있게 행복하게 하면서도
실행할때 지나치게 심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깊게 기쁨이 넘치게 숨을 들이쉬면서
안간힘을 쓰면서 이렇게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주의깊게 숨쉬고 있단 말이야!"
(웃음)
"나는 훌륭한 수행자야!"
(웃음)
불교에서는 "무수행을 수행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hanh vo hanh hanh',
"무수행의 수행"
겉으로 수행하는게...
보일 필요 없습니다.
그래야 수행의 본질을 더 잘 전달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도 행복하고 평온하고 평화롭고 싶다면,
함께 수련할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질겁니다.
(번역: 한국 주의깊음 수련 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