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시엘라 이투르비 : 저는 사진을 아주 빨리 찍습니다. 저는 저의 직관을 따르며 저를 놀라게 하는 것들을 찍곤 합니다. 저는 결코 인공적인 빛이나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바로 이렇게 저의 카메라를 사용합니다. 프리다 칼로의 집은 여러 차례 사진으로 찍힌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집은 사진을 찍기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보여지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고자 항상 애를 씁니다. 프리다 칼로의 전체 삶을 다룬 전시회가 덴마크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가 컬러로 찍은 몇 가지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병원에서 입은 옷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녀가 그린 것들이지요. 일부는 피이고, 일부는 물감입니다. 미술관의 관장이 저에게 프리다의 욕실을 찍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저는 흑백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저 자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 미술관으로 옵니다. 그녀는 여전히 성인(sainthood)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프리다의 열광적인 팬은 아닙니다. 그녀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점을 존경합니다. 고통에 관한 저의 사진은 아주 가톨릭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톨릭 교육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이 프리다의 욕실입니다. 이것은 자화상입니다. 저는 발 수술을 한 뒤에 욕실에서 제 사진을 직접 찍었습니다. 그녀는 "물이 나에게 준 것(what the water gives me)"라는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물에 담긴 그녀의 발이 나옵니다. 저는 저의 모습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이 사진은 트로츠키의 집에서 저 자신을 찍은 것입니다. 저는 트로츠키의 증손녀와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제가 그곳에 갔을 때, 저는 조금 우울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총알이 박힌 구멍이 많은 집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집은 정치적 기억들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저희 가정에는 13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첫째입니다. 아주, 아주 카톨릭적인 가족이었어요. 저는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가 저희 가족 중에서 더이상 카톨릭이 아닌 유일한 구성원입니다. 저는 현재 무신론자입니다. 음, 불가지론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어린아이였을 시절 흑백으로 된 제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저는 사진을 몰래 훔쳤고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서랍장을 열어서 사진을 꺼내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저 자신의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흑백 사진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어렸을 때 결혼했습니다. 저는 19살 때 결혼했습니다. 저는 26살이 되었을 때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미 아이들이 있었어요. 제가 영화 학교에 입학하게 된 일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마누엘 알바레즈 브라보가 저를 가르쳤거든요. 아무도 그의 수업을 듣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영화 감독이 되기를 원했거든요. 그렇지만 세 번째 세션에서 그가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내 조수가 되어주겠어?" "그럼요. 정말 기뻐요" 이렇게 해서 저는 이 놀라운 남성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마누엘 알베레즈 브라보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따금 그는 그가 좋아하는 풍경을 앞에 두고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그를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사진에 대해 가르쳐주었고 인생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거든요. 알바레즈 브라보는 추상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 밑둥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그가 나무 밑둥을 찍으려고 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저는 "안돼요."라고 말했어요. "이 사진을 찍으면 영향력이 너무 커질거에요. 안 찍는 게 낫겠어요." 그러나 그 이후로 아름다운 빛이 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이것은 후치탄을 배경으로 합니다. 저는 후치탄으로 갔습니다. 화가인 프란치스코 톨레도가 그곳 출신이거든요. 그는 작품을 함께 하고 컬처하우스에 그것을 전시했하기 위해서 저를 초대했습니다. 우리가 그저 사진을 함께 찍은 것이 아니며 서로를 많이 도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6년 정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갔다가 되돌아왔고, 예술에 깊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치탄에 사는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었어요. 이분이 톨레도의 이모입니다. 후치탄은 동성애를 허용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멕시코에서도 아주 자유주의적인 몇 되지 않는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매그놀리아(Magnolia)입니다. 저는 여성들과 함께 맥주를 사고 있었어요. 그리고 매그놀리아는 말했습니다. "이봐요, 내 사진을 찍어줄 수 있어요?" 저는 말했어요. "물론이죠." 이 사진에서 그녀는 화장을 했습니다. 저는 후치탄 시장으로 갔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저를 환대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들과 함께 토마토를 팔았어요. 저는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 뒤에 이 여성이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술베다(Sulveda)입니다. 12개의 사진이 있죠. 오직 두 마리의 이구아나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이구아나를 팔아서 사람들이 먹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이 사진을 우리의 이구아나 아가씨(Our Lady of Iguanas)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의 종교가 이때 다시 빛을 발휘합니다. 이 작품은 제가 세리스(Seris) 사람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들은 후치테카스 출신의 사람들(Juchitecas)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리스 사람들고 함께할 때 모든 것이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동안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후치탄에서만큼 길게 산 것은 아니었지만요. 이 작업들은 대개 동시에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작품들을 1979년에 찍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지역 토착민들에 의해서 염소가 도살당하는 것에 관한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토착민들은 여러 해동안 부유한 스페인 고용주들을 위해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적은 보수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염소를 죽이기 전에 십자를 그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책의 제목을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라고 지었습니다. 각 작품에서 저는 다른 것들을 발견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종교적인 측면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희생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강렬한 것들을 사진으로 찍기를 좋아합니다. 이 작품은 제가 유럽과 인디언 혼혈들(Cholos)과 함께 작업한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주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그들과 한동안 함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80년대에 로스 엔젤레스에서 콜로스들(Cholos)과 함께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저는 티후하나로 갔습니다. 당시 작품은 모두 콜로인들의 영향을 받았죠. 저는 조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곳에 오직 2주만을 머물렀습니다. 저는 이후에 되돌아왔습니다. 그 일 때문에 저는 아주 우울해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 멕시코인들이 미국으로 갔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 일은 아메리칸 드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 멕시코에서 그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죠.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미국 남부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풍경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제가 찍을 풍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미국에서의 삶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의 거리에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멕시코와 다른 점이에요. 그리고 저는 현재 대부분 풍경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저는 인도로 갔습니다. 첫 번째 여행에서 저는 사람들에게 집중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네 번 더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곳에 아무도 없다(There is No One)라는 책을 편찬했습니다. 그곳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오직 오브젝트만이 존재합니다. 오직 풍경들만 존재하죠. 저는 언제나 추상적인 것들을 사진으로 찍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건물들과 건물 철골 구조물들을 찍습니다. 이것들은 제가 사진을 찍을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어요. 저는 올해 초에 엘에이에서 프로젝트를 완성했습니다. 저는 엘에이에 한달 반 정도 있었습니다. 이 작품이 시에브 오브 스카이, 크리바 델 시엘로(Criba del Cielo)라고 불립니다. 이건 격자입니다. 이 격자 사이로 빛이 통과합니다. 또는 무언가가 뇌를 통해서 통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품은 파비엔느 브라뒤(Fabienne Bradu)가 쓴 글귀를 함께 실었습니다. 그는 저의 가까운 친구이고 아주 훌륭한 작가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카메라는 이 세상을 알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저는 제 눈이 보는 것과 제 심장이 느끼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 격자를 썼냐고요? 그것이 감옥,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봉해진 곳이죠. 저는 이따금 제가 감옥에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갖혀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저의 카메라가 저를 이런 기분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줍니다. 이것이 저를 어루만지고 움직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것도 이것입니다. -홀라 아미 코모 에스타스? -저는 언제나 저의 손자 손녀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모두에게 사진 앨범이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이야기함] 그녀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언제나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이들은 반복될 수 없는 큰 기회를 포착한 작품입니다. 스타일을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더 중요하게는, 인간이 그들의 삶을 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그 예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죠. -저는 작가입니다. 저희 어머니 덕분에 여러 장르는 넘나드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주로 급진적인 부분들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모두 스페인어로 이야기함] 또한 저의 정신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웃음] 저는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영화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진을 찍고 싶기도 했어요. 제가 학위를 받았을 때 경로를 바꾸거나 다른 장소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집을 디자인해보라고 제안한 것도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사는 집입니다. 중요한 것은 건축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연구와 철학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배웠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알고 지내는 알바레즈 브라보로부터도요. 건축은 도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연구입니다. -[스페인어로 이야기함] [웃음] -저는 테이트 현대 미술관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테이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 일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이 언제나 예술적인 훈련에서부터 탄생한 붉은 머리를 한 의붓자식같은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별안간에 이러한 중요한 화가들에게 아주 가까운 존재가 되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그렇지만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저는 사진작가가 연구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이 세상과 삶,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제가 사진작가가 아니었다면, 저는 매우 곤궁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저는 불운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지금의 저는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 앞으로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니까요. (고요한 전자 음악) "21세기 아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거나 교육적 자료로 활용하고 싶으시면 PBS.org/Art21로 접속해 주세요. "21세기 아트"는 DVD로도 입수가 가능합니다. 주문을 하시려면 shopPBS.org로 방문하시거나 1-800-PLAY-PBS로 전화해 주세요. (고요한 전자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