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적 논쟁은 자주 의미론에 대한 논쟁으로 축소됩니다. 그렇지만 오늘 에피소드에서는 느낌의 인식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도와드리기 위해 의미론을 가지고 놀아보겠습니다. 수천 년 전 바람(desire)은 고통의 원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요? 아니요.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습니다. 그때 사용되었던 단어는 Taṇhā였습니다. 직역하자면 Taṇhā는 갈증을 뜻합니다. 갈증과 바람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주 많습니다! 갈증과 바람은 동전의 다른 두 면입니다. 갈증은 바람의 그림자 측면입니다. 즉 선택이 두 개의 면을 가진 동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한 면에는 바람이, 다른 한 면에는 갈증이 있습니다. 갈증은 선택이라고 불리는 이 동전의 그림자 측면입니다. 갈증은 먼저 결핍이 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그 결핍이 우리가 바람이라고 부르는 갈망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갈증은 애착(attachment)입니다. 애착은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은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싫어하는 것의 반대되는 것 즉 우리가 애착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에 있습니다. 애착은 우리에게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극도로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증의 부산물인 애착은 중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애착은 우리가 어떠한 것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원하게 되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갈망하는 것입니다. 갈망과 바람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갈망은 바람의 그림자 측면입니다. 갈망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박탈감을 인식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산물인 것입니다. 바람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원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생에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만약 바람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바람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람을 변화시키고 승화할 수 있습니다. 바람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경험에 대한 승낙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람은 대조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나오는 승낙입니다. 바람은 거절의 부산물이 아닙니다. 즉 바람은 경험 혹은 경험의 선택을 승낙하는 것이고 그것은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애착의 형태를 띠지 않습니다. 바람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저항이 없는 형태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신의 도구입니다. 그것은 확장(expansion)과 자아 인식, 자아 실현을 도와줍니다. 갈망은 에고의 도구입니다. 싸대기 맞을 준비가 되셨나요? 에고는 부처가 알지도 못했던 말입니다. 부처에게 에고라는 말을 한다면 부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에고는 프로이트가 사용한 용어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에 적용하여 사용하기 위해 받아들여진 용어입니다. 에고라는 용어는 분리된 자아가 없는 깨어난 관점과 자아의 분리된 감각이 존재하는 깨어나지 않은 관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후에 칼 융은 이것을 의식 대 무의식을 뜻하는 그림자 측면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처가 자신의 깨어난 경험을 정확히 설명했을 때 부처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그가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던 양극성을 관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 고통과 행복과 같은 양극성 말이죠. 그리고 깨어남이 모든 양극성을 초월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깨어남은 고통이 아니듯이 행복도 아닙니다. 깨어남은 양극성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지금까지는 이 우주의 모든 움직임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어떠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원치 않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향해 움직이고 싶어합니다. 이 고통은 조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존재하는 영원한 조건입니다. 긍정적인 것을 향해 움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며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멈춰서 현재의 순간에 장미향을 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이 고통으로 인해 정해집니다. 모든 결정은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입니다. 멀어지고 싶다고 바라는 것이 없는 삶을 상상해보세요. 고통에 완전히 저항하지 않는 상태의 즐거움을 위해 삶을 살아갑니다. 눈물의 길을 끝내기 위해서 멀어지고 향하는 이 영원한 움직임은,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갈망을 향하는 이 움직임은, (애착이라는 것은 단지 이러한 움직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향해 돌아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과 완전히 함께하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고 그것을 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꿀 필요 없이 그것을 기꺼이 경험하고 싶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죠. 의식의 부재의 그림자 속에 의식의 존재의 빛을 기꺼이 가져오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싫어하는 것에 싫어하는 감정을 갖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바람이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바람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환생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환생을 향한 갈망은 영혼 그 자체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영혼은 이제 싫어하는 것 혹은 갈망하는 것에 의해 선택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깨어남은 세 가지 뚜렷한 단계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는 당연히 미래에는 잠재적으로 더 많은 단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저는 깨어남을 이 세 가지 주요 단계들로 축소했습니다. 삼위일체처럼 말이죠. 이제 이 단계들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영성 101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현실을 창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영성 101은 우리에게 비참해지는 대신에 행복해질 선택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안녕을 늘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우리는 즐거움의 방향을 따라 흐릅니다. 우리는 즐거움을 허락합니다. 우리는 다른 그 어떠한 것들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우선시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기분을 느끼는 것에 우리의 인생을 바칩니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른 싫어하는 것들 때문에 무언가를 원합니다. 우리는 아직 비참한 기분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도망다닙니다. 싫어함과 갈망, 원하지 않음과 원함의 끝없는 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내심 느끼기 시작합니다. 어떠한 것을 갖든 더 원하죠. 이러한 순환이 더 이상 예전에 그랬던 것만큼 즐겁지 않게 되죠. 그리고 이제 두 번째 단계, 영성 2.0의 단계입니다. 영성 2.0에서는 바람을 향한 모든 움직임이 원하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임을 그리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그 무언가는 절대로 우리를 쫓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폭풍이나 토네이도처럼 곳곳마다 우리를 쫓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향해 돌아서서 폭풍의 중앙으로 곧장 걸어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결정합니다. 긍정적인 감정을 허락하는 대신에 이제 우리는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을 허락하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저항성이 존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이죠. 우리는 통합하고 온전해집니다. 무의식을 의식하게 됩니다. 갈망은 순수한 바람이 됩니다. 그림자가 더 이상 의식의 빛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해집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나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느끼게 되는 것이 됩니다. 싫어하는 것 없이, 따라서 갈망 없이 현재의 순간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과거가 우리를 미래로 향해 미는 것을 멈추고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영성 3.0에 준비된 것입니다. 영성 3.0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바람에 따라 의식적으로 창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더 이상 싫어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영성 3.0은 우리가 선택이라고 부르는 영역인 것입니다. 갈망하는 대신에 자신의 무한한 창조자적 본성을 인식하고 고통과 상관 없이 부유해질지 그렇지 않을지를 선택합니다. 즉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부유한 사람의 관점이 궁금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거야. 마치 내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원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너무나도 싫기 때문에 딸기 아이스크림을 원하는 게 아니거든."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을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영감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지금에 존재합니다. 더 이상 과거가 현재나 미래에 투사되지 않습니다. 영성 3.0는 그림자 속에 빛을 비춤으로써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무의식 안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깨어나기 시작할 때 자신의 존재의 양극성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빛의 측면과 그림자의 측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긍정성과 부정성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림자 측면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굉장히 많이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여태껏 살아온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벗어나 빛으로 기어들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이것이 영성 101입니다. 영성 2.0에서는 의식 상태에 도달한 후, 구멍에서 빠져나와 빛 속으로 기어들어온 후 의식이라는 빛을 붙잡고 자신의 그림자의 심연 속으로 다시 내려갑니다. 우리가 마주한 그 그림자는 의식의 빛과 함께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영성 3.0을 향해 진화합니다. 무의식이 의식이 됩니다. 양극성이 소멸합니다. 우리는 우리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우리는 반대되는 것들을 초월한 상태인 진정한 평화를 경험합니다.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평화는 단지 사이 좋게 지내는 것, 전쟁과 내적, 외적인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대립과 양극성이 없는 상태입니다. 평화는 대립이 없고 오로지 하나의 통합된 존재가 있는 곳 즉 영원의 상징의 중앙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깨어남이라고 부르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남은 은퇴가 아닙니다. 깨어남은 의식적이게 되는 계속되는 과정에 따라 생겨나는 부산물에 더 가깝습니다. 우주 혹은 근원이 자신에 대해 더 자각함에 따라 더 자각해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따라서 더 큰 우주의 소우주인 우리는 더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경험할 깨어남은 언제나 더 많아집니다. 깨어남의 이 세 가지 단계는 영원의 상징 속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상징을 이용해서 깨어남 세 단계의 과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이 특정 단계들에 붙인 이름 때문에 우리는 어떤 단계가 그 전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라는 생각의 함정에 빠집니다. 수평선 상에서 이것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주는 어떤 단계가 그 이전 단계보다 더 높거나 중요한 단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주가 기어가는 것을 걸어가는 것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기어가는 것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 단계들을 양쪽 모두 동일한 무게를 가진 저울처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한의 상징을 보면 양극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쪽에는 물질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비물질이, 한 쪽에는 삶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죽음이, 한 쪽에는 빛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양극성의 사이에는 정적인 한 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무한을 실제로 나타내는 부분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균형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통합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의 초월입니다. 따라서 이곳에 영성 3.0이 있습니다. 한 쪽에는 영성 101이, 다른 한 쪽에는 영성 2.0이,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영성 3.0이 있습니다. 깨어남의 단계를 서두르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모두 언제나 엄청난 기분을 느끼고 견고하게 현재의 순간에 있고 저항성이 존재하지 않는 초월의 장소에 서둘러서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깨어남의 이 단계들은 서둘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서두르는 단계는 영성 2.0의 수행 단계입니다. 영성 2.0은 우리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도망치며 보냈던 감정들을 저항하려고 하는 함정에 다시 빠지는 곳이죠. 이것이 제가 오랜 기간 동안 영성 3.0에 대해 가르치지 않은 이유입니다. 영성 3.0에 대해 가르치는 대신에 저는 사람들이 영성 3.0에 다다르기 위해 영성 2.0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성 2.0의 수행 속에 있을 수 있게 되도록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3.0에 다다르기 위해 2.0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성 2.0의 포인트를 놓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이 느끼는 바와 무조건적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들에 저항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 년을 영성 2.0을 수행하며 보냅니다. 이 깨어남의 과정에서 우리는 날기 전에 걷는 법을 배우고, 걷는 법을 배우기 전에 기는 법을 배웁니다. 한 단계가 다음 단계를 이끄는 다른 기술들을 말이죠. 우리는 걷는 법을 배우게 되면 기는 단계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는 법을 배우기 전에 걷는 단계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확장을 돕기 위해 다른 기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성 3.0은 영성 101과 영성 2.0의 아름다운 융합입니다. 영성 101은 주로 빛을 허락하는 것이고 영성 2.0은 그림자를 허락하는 것이고 영성 3.0은 겉으로 보기에는 반대되는 것들의 융합의 초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영성 101은 아버지, 영성 2.0은 성령 그리고 영성 3.0은 아들입니다. 즉 빛이 신이고 그림자가 여신이라면 빛과 어둠의 융합은 그 아이입니다. 영성 3.0에서는 영성 101에서 배운 기술들 '우리의 현실을 창조하기', '의식적으로 집중하기', '긍정적인 의도'가 다시 과정속에 더해집니다. 그렇지만 영성 2.0 덕분에 그 기술들은 정화되었습니다. 이 바람과 수행들은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회피나 저항의 부산물도 아닙니다. 이 때문에 바람을 향해 움직이는 것에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선택을 함에 있어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성을 살아가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 실현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하고 총체적인 인식과 깨달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좋은 한 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