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메이 윔스: 있잖아요, 이건 마치- 이 상자를 열면 마치 문제를 끝없이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이건 가장 놀라운 프로젝트였어요. 저에게는 반드시 사용해야 할 사진들이 있었어요. 그 사진들에 대해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저는 오랫동안 다양한 수업에서 그것들에 대해 강의했어요. 그리고 그중 일부는 하버드 기록 보관소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이것들 중 하나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찍힌 아주 초기의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노예 가족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흑인들이 사진 속에서 어떻게 다뤄졌는지, 그리고 사진 속 흑인의 역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종 작품들은 텍스트와 함께 하며, 그 글자들은 유리에 새겨져 있어요. 사진들이 유리 뒤에 놓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데, 이는 유리와 텍스트가 관객이 사진과 소통하는 방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네 장의 사진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압축하고 결정화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시리즈에는 30장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어요. 게티 시리즈의 모든 사진은 다른 역사적 자료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이에요. 하버드는 제가 처음에 보여준 그 사진들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저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인 하버드가 자신들의 소장품 속 흑인의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나를 고소하려 한다고요. 저는 법적으로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도덕적으로 이 일을 공론화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저는 하버드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어요. "저를 고소하는 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고소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법정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해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매우 교육적인 일이 될 것이고, 특히 차용 예술을 실천하며 더 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하버드는 "아니, 우리는 그녀를 고소하지 않는 게 낫겠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제게 사진이 판매될 때마다 사용료를 지불하라고 요구했어요. 그 후, 하버드는 그 사진들을 자신들의 컬렉션으로 구매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좋아요, 당신들이 사진을 샀네요. 그런데 제가 당신들에게 사용료를 내야 하나요? 또 내야 하나요?" 저는 좀 혼란스러웠어요. 저는 정말 크고, 멋지고, 조금은 정신없는, 대략 300명쯤 되는 대가족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저는 저와 가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 일은 저에게 매우 중요했어요. 저는 제 존재의 본질과 제 목소리, 그리고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제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어요. 이야기와 서사는 우리 가족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죠. 저는 방금 가족 모임에서 돌아왔어요. 우리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넬리 이모가 정말 아름다운 스크랩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 사진을 정말 좋아해요. 저는 이 사진과 함께 자랐어요. 이 사진은 마치 우리 가족의 닻, 그리고 기반 같은 존재에요. 이 사진에는 저의 아름다운 어머니와 그녀의 모든 자매들이 있어요. 저는 그분들을 모두 너무나 사랑해요. 이것은 제 할아버지의 사진이에요. 제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자 아메리카 원주민이었고, 흑인 여성인 할머니와 결혼하셨어요. 그리고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두었죠. 할어버지는 대단한 분이셨어요. 백인처럼 보였기 때문에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가족 전체를 고용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가끔 할머니 오지(Osie)를 데리고 일하러 가셨을 때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흑인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고당하기도 했어요. 어떤 때는 할아버지가 차에 모든 아이들을 태우고 있을 때, 백인들이 지나가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왜 차에 저런 흑인 애들을 태우고 있나?" 그분들은 정말 특별한 분들이셨고, 그들이 만들어낸 유산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리고 제 어머니와 그녀의 자매들이 그 놀라운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요. 저는 16살때 집을 떠났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가서 말했어요. "아빠, 저 혼자 독립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정말 독립해서 집세를 내고 음식을 사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하면서 매일같이 집에 돌아와서 도움을 청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그리고 저는 "네, 저는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좋아,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해봐. 만약 해보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 하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혼자서 잘 살아보렴." 그리고 저는 집을 떠났고, 그 이후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친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갔어요. 저는 어느 정도 춤과 연극에 관심이 있었어요. 저는 춤을 정말 잘 출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저는 유명하고 놀라운 안 할프린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안은 당시에 이미 평화에 대한 아이디어와 춤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연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는 춤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저는 시각 예술이야말로 저에게 더 맞는 길이라고 느꼈어요. 그러다가 사직작가였던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참여한 모든 파티, 행사, 집회, 시위 장면을 촬영하곤 했어요. 우리는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급진적인 삶을 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저에게 사진이 무엇인지 처음 알려주었어요. 저는 1960년대 버밍엄 폭동에 대해 공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장면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게 떠올랐죠. 저는 찰스 무어가 찍은, 제가 사랑하는 한 사진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찰스무어는 제가 그의 사진을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 이미지들을 직접 생생하게 만들어야겠다. 그 순간을 재구성하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버밍엄으로 가서 몇몇 학생들을 모았고, 우리는 일련의 행동을 했어요. 그 결과 1968년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한 전체 시리즈를 다시 만들 수 있었어요. 저는 우리가 놀라운 순간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폭동 이후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마틴 루터 킹이 40년 전에 사망했으며, 저는 그 이전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틴의 암살 사건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지요. 말콤의 암살 사건도 살펴보아야 했어요. 메드가 에버스, 로버트 F. 케네디, 존 F. 케네디의 암살도 살펴봐야 했어요.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순간에 도달했는지 생각해야 했죠. 그리고 저는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 놀랍고, 격동적이며, 잔인한 역사가 그의 출마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며, 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오바마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문자 그대로 이전의 모든 것들의 유산과 정신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만약 지금 그것들을 보지 않는다면, 그 모든 종류의 트라우마와 애도, 그리고 지난 40년의 역사속 슬픔을 보지 않는다면, 제가 하는 일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업이 다른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 역사를 바라보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현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저에게는 중요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이 순간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제 마음속 깊이 숙고하는 것이 저에게는 중요했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 학생들에게 그 역할을 맡게 해서 그 역사를 알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정말로 중요했어요. 학생 견 허: 이것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1968년인 것 같아요. 저는 버스 보이 역할을 했고, 그의 이름은 후안 로메로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 그가 총에 맞았을 때, 이전에 그를 만났던 버스보이가 그에게 달려가서 괜찮은지 묻고 묵주를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장면을 재연했어요. 이민자의 딸로서, 이전에 그런 경험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제 부모님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잘 모르세요. 그래서 제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학생 애슐리 비에이라 : 이것은 켄트 주립대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저는 그 사진 속 소녀를 연기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감정적인 상황이었어요. 캐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어요. 그리고 목소리를 들으면 진정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무대에 올라갔을 때, 처음에는 정말 긴장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어떻게 그 순간에 몰입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캐리가 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자 모든 감정이 몰려왔고 저는 정말 심하게 울었어요 캘러리 관람객 1: 베로니카, 켄트 주립대 사건 사진 기억나. 갤러리 관람객 2: 아, 그래? 갤러리 관람객 1: 응, 기억나. 그 실제 사진이 기억나.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그 장면을 봤던게 기억나. 그래, 이 사진들 중 일부는... 이런 것들은 또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어. 알겠지? 캐리 메이 윔스: 이 사진들에서 나온 것, 그러니까 내가 정말 정말 사랑하는 것은, 또 다른 작업방식이에요.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 말이죠. 저는 학생들이 단순히 연구하고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 연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켄트 주립대 학생들은 언제 사망했는지, 누가 있었는지,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다른 희생된 학생들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하기를 바랐어요. 그들은 그런 모든 작업을 해야 했고, 저는 그 때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걸 아주 고도로 인위적인 방식으로 구성해 보아야 한다고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연단 위에 올려놓고, 모든 요소를 배치한 다음,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자고요. 모든 조명을 보여주고, 그냥 모든 걸 노출하자고요. 그 모든 것들이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거였어요. 영화 내레이션: 이 구성된 공간, 우리의 교실에서, 우리는 과거를 다시 살펴봅니다. 학생들은 그 사실을 조사하고, 역사 구성에 참여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전해준 역사죠.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어두운 역사, 자신들의 혹독한 현실과 맞서게 됩니다. 캐리 메이 윔스: 이 사진들과 함께하는 영상은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로 시작해서 끝나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어요. "오, 그래 이게 또 다른 부분이네. 이게 2부겠구나."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거에요. -좋아요, 여러분, 갑시다. 비슷한 스타일로 존 메케인, 버락 오바마, 그리고 미인대회 참가자인 세라 페일린을 표현했어요. 저는 나이가 어린 이 매력적인 여자들을 모아서 하이힐과 망사 스타킹을 신고 걸어 다니게 했어요. 그리고 이제 저는 오바마가 정말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이 작업은 더 많은 신뢰성을 부여했어요. 결국 성공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니까요. -각자 차례대로 카메라를 향해 걸어볼 거에요. 알겠죠? 그게 우리가 할 일 중 하나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준비해야 해요. 이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할 거에요. 우리는 아마 얼마 전, 저는 시카고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테이프 레코더를 켜고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지난 수많은 해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요. 그 순간, 버락 오바마가 정말 대통령이 될 것처럼 보였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요. 저는 평생 처음으로 "내 나라, 내 나라, 내 나라"라고 말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시간... 왜냐하면 저는 이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며, 일종의 확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여러분은 모두 연극에 참여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작업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저는 이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결국 여러분 자신보다 더 큰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에요. 이것은 여러분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사용하여 우리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이야기할 거에요. 알겠죠? 그러나 우리가 여러분의 몸을 통해 표현할 역사적 이야기에서 자신감을 찾으세요. 단 한 순간에, 미국인들의 상상력이 엄청나게 변화했어요. 단 한 순간에요. 이곳을 자신의 고향으로, 자신을 대표하는 장소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갑자기 "내 나라" 그리고 "내 대통령" 그리고 "내 것, 내 것, 우리의 것"이라고 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