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와 인터넷은 제게 슈퍼 파워와 전투에 맞설 장비와 총알을 막아낼 복장을 주고 커다란 신호를 하늘에 비추어 언제 싸워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므로 "증거"가 없습니다. 사실, 제 로튼 토마토 점수는 지금 50%를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왜 저를 들여보내 줬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웃음) 하지만 이 자리의 주제가 우리보다 더 커다란 힘과 맞부딪히는 일이라면, 제대로 온 게 맞습니다. 지난 해, 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으로 흥미로운 한 해를 보냈거든요. (박수와 환호) 감사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관계라는 주제에 대해 말해보자면, 제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은 제 삶 속에 있었던 관계의 집합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누군가가 저보다 일찍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이야기는 제가 처음으로 신성한 책을 펼치며 시작합니다. 각종 장치로 가득한 그 신성한 책은 바로 “샤퍼 이미지”예요. (웃음) 네. 아는 분도 계시네요. 샤퍼 이미지는 꿈으로 가득한 마술같은 잡지였습니다. 실제 있으리라 생각도 못해본 물건들이 그 잡지 안에 있었죠. 우편 주문도 할 수 있었죠. 이전에 전혀 존재했을 것 같지 않은 제품, 가령 "그레고리"는 실물과 똑같은 휴대용 마네킹으로 강인하고 남성적인 외모로 범죄를 단념시킵니다. 실제로 있는 (웃음) 암튼, 정말 존재하는 물건이죠. (웃음) 하지만 제 시선은 시마 비디오 에디트 2에 꽂혔습니다. 10살이었던 저에게는 무척 근사해 보였습니다. VHS 플레이어를 모조리 연결해 함께 편집할 수 있었죠.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이걸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기 전 제 부모님에 대해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적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중국과 대만에서 건너와 캘리포니아, 로스 알토스에 정착하셨습니다. 지금 실리콘 밸리가 실리콘 밸리로 불리기 전이었죠. 부모님은 셰프 추라는 음식점을 시작하셨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식당에서 일하십니다. 두분은 여전히 거기 계시고 저는 거기서 자랐으며, 좋았습니다.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식당은 관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러 혹은 사업 거래를 위해, 먹고 마시려고 식당을 찾았습니다. 관계맺음의 공간이었죠. 저는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 이야기하셨습니다. 미국에서는 사랑만 있으면, 열심히 일해서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희 다섯을 전형적인 미국 아이로 키우셨습니다. 저는 막내로, 여기 보면 눈을 감고 있는 게 접니다. 부모님께서 누나와 제 이름을 제니퍼와 조나단이라 지으셨는데, TV쇼 "부부 탐정"에 나온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웃음) 부모님이 얼마나 미국을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죠. 부모님은 우리가 케네디 일가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그러셨죠. 저희를 항상 같은 차림으로 입히시고 예절 교실이나 볼룸댄스 교실에 보내셨으며 제대로 된 치과 보험에 들어 주셨습니다. (웃음) 이 사진은 제 실제 모습입니다. 합성 아닙니다.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가족이 휴가 갈 때마다 제가 비디오 카메라를 담당했고 녹화한 장면을 모두 모아뒀지만 그걸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시마 비디오 에디트 2가 필요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셨고 저는 매일 밤을 새며 모든 VCR과 씨름하며 형과 누나의 방에서 전선에 얽히는 사투 끝에 결국 보여줄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밤 거실로 가족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마 1991년 즈음이었을 겁니다. 가족 모두를 거실에 앉게 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습니다. 마치 지금처럼요. 제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홈 비디오 편집본이라 운 건 아니었죠. 꽤 괜찮은 작품이긴 했지만요. (웃음) 하지만 우리를 한 평범한 가족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화면 속에서 어울리고 서로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마치 열렬히 좋아하던 영화나 저희의 이름을 따온 TV쇼처럼요. 저는 다섯 아이 중 막내로서 평생 처음으로 제 마음이 전달되었다고 기억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재료가 근사한 전기 제품을 거쳐 만들어지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시작으로 남은 인생 내내 이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열정이 생겼으니 이제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터에 나가 셰프 추에 방문하는 손님에게 저의 홈 비디오 편집 기술을 끊임없이 자랑하셨고 운 좋게도 가게가 실리콘 밸리에 있었죠. 덕분에 손님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관련된 일을 하는 엔지니어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디지털 영상 편집에 필요한 것들을 주었습니다. 아마 90년대 중반이거나 초반이었을 겁니다. 저 같은 아이에게 이런 것들이 없던 시절이었죠. 저는 HP와 Sun 그리고 어도비 러셀 브라운 같은 데서 나온 시험용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얻었습니다. 설명서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배워야 했고 점점 더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저는 USC 영화학과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가끔 전화하셔서 항상 중국 뿌리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중국이 언젠가 거대한 영화 시장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하셨죠. “알겠어요.” 건성으로 대답했죠. (웃음) 항상 부모님 말씀 잘 들으세요. (웃음) 저는 저메키스, 루카스나 스필버그가 되고 싶었습니다. 다루고 싶은 순위가 가장 낮은 주제가 저의 문화 정체성과 저의 민족성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진심으로 마음을 열 사람을 만나지 못했죠. 만난다고 해도,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그냥 무시하고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15년 후로 넘어가볼까요. 할리우드에 입성합니다. 스필버그 감독이 저를 발견했고 더 락과 브루스 윌리스 그리고 저스틴 비버 같은 스타와 함께 일했죠. 심지어 TED 스테이지에 댄스 컴퍼니 LXD를 소개하러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말 근사했죠. 그리고 몇 년 전, 저는 창의성을 약간 잃은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동력이 조금씩 약해지던 차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성을 들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새 소리였습니다. 네. 사실, 트위터였습니다. 트위터에서 들은 소리는 (웃음) 콘스턴스 우의 목소리였고 대니얼 대 킴의 목소리였고 오늘 이 자리에 온 제니 양, 그리고 알란 양도 포함해서요. 모두가 할리우드에서의 느꼈던 아시아계 미국인 차별 문제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죠. 생각은 해봤지만 실제로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동안 정말로 집중했고 일을 할 수 있어 행운이었지만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도대체 할리우드는 왜 이런 거야? 왜 아무도 나서지 않을까?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제 자신이 할리우드임을 깨달았습니다. 말 그대로, 이 자리에도 옷깃에 힘주고 나올 정도로 저는 할리우드입니다. (웃음) 아직도 서 있나요? 좋습니다. (박수) 그동안 내내 저에게 너무 많이 주어졌다고 느꼈는데 정작 사랑하는 영화계에 어떤 보답했을까요? 여기에 나와 행운이지만, 이 순간, 저는 단지 운이 좋아 여기 나온 것이 아니라 나올 자격이 있음을 깨달았죠. 아니, 나올 자격을 얻어냈습니다. 못 자고 일한 모든 밤과 일하느라 놓친 금요일 파티와 영화를 편집하느라 잃어버린 친구와 여자친구들, 단지 입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하기 위한 자격을 얻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려고요. 저는 사실 슈퍼 파워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때 변화를 이루어내는 능력입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속한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겁이 날 수도 있고 혼자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말해줬습니다. 제 이야기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줄 군단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줬습니다. 저는 케빈 콴의 놀라운 소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찾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소설을 함께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모두 아시안 인 캐스팅으로 25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배역에 아시아인을 캐스팅한 현대물입니다. (박수와 환호) 하지만 시작할 무렵에는 보장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영화는 고정 관객을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영화를 보러 나타날 관객을 찾을 수 없었죠. 실제로, 영화를 보게끔 공짜 표를 나눠주는 시험 상영에서조차 겨우 1대 25 비율을 확보했는데, 25번 요청하면 단 한 사람만 왔던 거죠. 이런 이벤트 치곤 엄청 낮은 성공률이었죠. 원작 소설을 아는 아시아 인들은 할리우드를 신뢰하지 않았고 원작을 모르는 아시아 사람들은 영화 제목이 불쾌하다고 생각했으며 아시아 사람이 아닌 관객은 그저 자기가 볼 영화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다행히, 워너 브라더스는 저희를 외면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인터넷 어딘가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군단이 일어나서 작가와 리포터 그리고 블로거, 수년간 각자의 영역에서 글을 쓰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보태줬습니다. 그들은 포스팅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기술 창업자들이 소셜 미디어에 글을 쓰고 저희에 대한 기사를 “LA 타임스”와 “할리우드 리포터”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올렸습니다. 마치 풀뿌리가 솟아오르며 저희를 뉴스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보면서도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증가하는 지원과 관심은 온라인 상에서 모든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서로 토론하고 의논하는 대화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뭐를 말해야 하고 어떤 건 아닌지 혹은 어떻게, 우리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삼아도 될지? 캐스팅은 어떤지? 어디까지 밀어붙여도 좋을지? 모두가 동의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가 흘러 성장을 위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대화는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연결된 조직 세포로 하나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커다란 화면에 어떻게 자신을 선보일지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영화관에 가자 이 현상은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경험인데, 개봉 첫 주말, 저는 영화관에 갔고, 거기엔 아시아 사람 뿐 아니라 다양한 관객이 있었어요. 저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리고 눈물을 흘렸으며 로비에 나가자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죠. 마치 떠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어요. 서로 껴안고 서로 축하하고 셀카를 찍고 이야기 나누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이 모든 다른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 작품과 무척 깊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어떤 영화일지 알 수 없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님이 그날 거실에서 우리 가족을 찍은 영상을 보셨을 때 느꼈을 기분을 전해 주었습니다. 화면으로 우리를 보면 어떠한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이 힘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긍지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 낱말을 머리로 이해했습니다. 이 낱말을 입으로 말한 적은 있었겠지만, 실제로 긍지를 느끼는 건 다릅니다. 긍지를 느껴보신 분은 알 겁니다. 모두 함께 손잡고 어울리고 싶은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긍지는 무척, 설명하기 정말 힘드네요. 긍지는 굉장히 신체적인 감정으로, 이는 모두 오랫동안 긍지를 통해 연결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저에게 주어진 선물이었고 그동안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계획을 짜고 스크립트를 작성하며 스토리보드를 만들 수도 있지만, 어떤 특정 시점부터 영화가 창작자에게 이야기를 되돌려주고 창작자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영화는 살아있는 유기체이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므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하며 이는 영화를 만들때 가장 흥미진진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제 삶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어려운 삶은 아니었어요. 작고 사소한 관계를 통해서 인도를 받아왔고 사람과 상황을 거치고 행운을 거쳐왔습니다. 이는 제 인식과 함께 바뀌었는데, 여러분이 듣기 시작한다면, 주변의 조용한 고동과 잡다한 소음에 귀를 기울이면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아름다운 화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운명으로 직접 연결된 길이자, 여러분의 슈퍼 파워입니다. 영화는 제게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부모님이 해주신 격려와 공동체를 통해 받은 지원으로 가능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순간에 제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페이스북에 뭔가를 올리셨어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정말 나쁜 것을 올리셨죠. 어머니는 페이스북 그만두셔야 할 것 같아요. (웃음) 어머니께서 인터넷 밈을 올리셨는데, 재미있는 것들 중 하나로, 이렇게 말합니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바꿀 수 없지만 결코 씨앗을 뿌리는 행위의 힘을 간과하지 말라.” 저는 이 강연 준비를 마무리하며, 제 삶의 모든 강력한 관계는 너그러움과 친절 그리고 사랑과 희망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지금 작업하고 있는 "인 더 하이츠"를 생각할 때면 (박수와 환호) 예, 괜찮은 작품입니다. 제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모든 것은 기쁨과 희망으로, 저는 최고의 순간이 이미 흘러갔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사실,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저에게 주어진 슈퍼 파워입니다. 사랑은 제가 물려받은 슈퍼 파워입니다. 사랑은 총알이 약실을 떠나 발사되기 전에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사랑은 장벽을 뛰어넘어 공동체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고 서로 손잡고 압도적으로 거대한 무언가에 직면할 용기를 주는 유일한 힘입니다. 저와 여기 계신 모두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자신의 일에 전념하면서, 그 일에 활기를 불어넣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며,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저는 친절이 우리가 이 땅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와 환호) 감사합니다. (박수)